백제의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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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외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루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안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으로 웅진(雄鎭·公州)으로 도읍(都邑)을 옮김에 따라 경제의 기반이었던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자 금강(錦江)주변에 제방(堤防)을 튼튼히 쌓아 수리 시설(水利 施設)을 확충(擴充)하고 유랑민을 귀농(歸農)시키는 등 여러 가지 농업 진흥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전부터 계속 되어 온 고질적인 귀족 세력의 반란을 잠재우고 전국에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22담로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강화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의 잦은 침입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시키고 새로 많은 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국방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 밖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新羅), 가야(伽倻)와도 화친(和親)하여 강성한 고구려의 침입에 따른 국난을 외교적으로 극복함과 동시에 국가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독창적인 백제 문화를 꽃피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무령왕은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선정(善政)을 펼쳐 국가 안정을 이루어, 이후 사비도읍기(泗都邑期) 성왕대(聖王代)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이와 같이 무령왕릉은 백제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소중한 능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점과 6호 무덤의 유물들이 도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령왕릉에는 5가지의 미스테리가 있다고 한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체류했다는 사실과 무령왕릉에 누가 들어왔었나, 무령왕의 왕비의 신분과 왕비의 나이, 무령왕릉의 묘제는 한반도 어느 곳에도 없다는 점, 무령왕릉의 청동거울과 일본천황의 거울은 쌍둥이 거울이라는 점으로 보아 백제 무령왕릉은 중국 양식,일본 양식,그리고 백제 왕가의 전통을 모두 갖고 있는 무덤이다. 그래서 미스테리가 많은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령왕릉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재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김종일, [이야기 백제왕조사], (청솔출판사), 2001
박영규,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한국생활사박물관 4(백제생활관)], (사계절), 2001
  • 가격1,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5.08.26
  • 저작시기2005.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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