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독립혁명 과 종교개혁 및 1차 세계대전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 미국의 독립혁명
1. 독립혁명의 배경
2. 독립혁명의 과정
3. 중앙정부의 탄생과 연방주의 시대

* 종교개혁 :
I 종교개혁의 요인
1.도덕적 요인 2. 지적인 요인 3. 사회적 요인
II 루터의 죽음과 평가
III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 1차 세계대전
Ⅰ. 서론
Ⅱ. 유럽위기의 상존
Ⅲ.독일의 세계패권 추구와 고립
Ⅳ. 결론

본문내용

러일전쟁은 강대국들의 예상과 달리 초기부터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1904년 가을 러시아는 자신의 발틱함대를 동아시아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발틱함대가 동아시아로 가는 도중에 북해의 도거뱅크에서 영국어선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영국과 러시아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 영국과의 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를린의 정책결정자들은 독일, 러시아, 프랑스 사이에서의 대륙동맹에 대해서 숙고하게 되었다. 대륙동맹의 목적은 러프동맹의 독일에 대한 적대적 성향을 제거시키고 나아가서 영국의 세계패권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러일전쟁은 계속해서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서 1904년 가을 이후 러시아는 유럽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더 이상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의 군사력을 신뢰할 수 없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영국에 접근하였으며 독일은 1차세계대전 이전에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즉 1887년이래 가장 큰 부담이었던 양면전쟁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베를린은 영프협상에 대한 파상적인 외교공세를 취하였다. 1905년 3월 러시아군이 봉천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즉 러시아의 군사력이 가장 약화된 시기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모로코의 탕어에 상륙, 1904년 영국이 인정한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특권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모로코의 독립을 독일이 보장한다고 선언하였다. 제국수상 뷜로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영프협상을 무효화시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공세는 무력에 의해서 지원 받고 있었다. 1905년 모로코위기는 1887년 이후 잠재해 있었던 서유럽에서의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을 다시 표면에 등장시켰으며 이번에는 프랑스측에 의한 복수전 개념이 아니라 독일측의 예방적 개념이 나타나게되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파상적인 외교공세와 프랑스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서 영프협상국은 독일의 예상과 달리 더욱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결국 뷜로는 패전과 혁명세력의 위협에 불안해하고 있는 러시아와의 동맹체결에 주력하였다. 1905년 7월 핀란드의 휴양지 뵈르쾨에서 빌헬름2세와 니콜라이 2세는 비밀조약인 독러방어조약에 서명하였다. 당시 독일측은 러시아의 주권자가 서명한 이 조약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패전과 혁명의 소용돌이로 피폐한 국가를 재건하는데 프랑스의 자본이 필요하여 11월말에 프랑스의 참여 없는 독러방어동맹은 무효라고 베를린에 통보하고 뷜로의 대륙동맹의 꿈은 깨어졌다.
뵈르쾨조약이 무산된 이후에 강대국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로코 문제와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차관공급문제였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결부되어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차관을 제공받을 수 있는 국가는 독일과 프랑스였으나 대규모차관을 장기간에 걸쳐 융자해줄수 있는 국가는 현실적으로 프랑스뿐이었다. 파리는 이미 러일전쟁 말기에 프랑스의 대규모차관제공에 대해서 두 가지 정치적 조건을 제시하였다 전쟁의 조속한 종결과 모로코문제에 관한 국제회담에서 프랑스측의 만족할 만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예측한대로 프랑스차관에 대한 정치적 조건을 받아들였다. 모로코문제를 협의하였던 알제시라스회담에서 러시아는 프랑스를 지원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서 외교적 승리를 획득하였다. 1906년 4월 알제시라스회담 직후 프랑스는 22억 5천만 프랑을 40년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러시아에 제공하였다.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각인 시킨 1906년 알제시라스회담은 뷜로와 홀슈타인 외교정책의 실패였다. 이 회담 과정을 통해서 러시아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회담의 승리자인 프랑스는 이후 영국과 우호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러일전쟁이래 위기에 빠졌던 러프동맹을 구출하였으며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더 이상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팽창정책을 감행할 수 없었고, 1907년 페르시아와 관련해서 영국과 협상을 체결하였다. 삼국협상이 성립되었다. 이후 러시아 세력의 유럽지역, 특히 발칸반도의 집중은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와 갈등을 야기시켰다. 1887년 이후 잠재되어 있었던 서유럽과 동유럽의 위기는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 이러한 과정속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904년 초 러일전쟁 발발 이후에 독일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국제정세는 2년뒤인 1906년초에 독일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으며 알제시라스회담이후 독일은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노력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경제·산업 분야와 해군력에서의 지속적인 대립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협상국들의 포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Ⅳ.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유럽각국이 1차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화염 속으로 한발한발 다가가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차세계대전의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으나 1차세계대전의 중요한 직접적인 원인은 내정적인 측면보다는 국제관계라는 측면에서 파악되어야한다. 7월위기에서 베트만 홀백이 '계산된 위험'을 감행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고립 내지는 삼국협상국가들에 의한 포위에서 비롯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 의해서 형성된 독일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뷜로는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려는 시도로서 대륙동맹을 창설하려하였고, 이를 위해서 모로코위기를 만들었으나 결과는 1906년 초에 독일의 외교적 패배였고, 대외적 고립이었다. 알제시라스회담 이후 고립을 탈피하려는 독일의 의지와 독일을 보다 더 철저하게 고립시키려는 협상국들의 노력은 1870년대 이래로 상존하고 있던 유럽의 서부와 동부의 위기와 결부되어서 전쟁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정상수, 「1차세계대전의 원인-독일외교정책을 중심으로」,
『서양사연구』22집, 1998, 서울대학교서양사연구회
윌리엄 카 著, 이민호·강철구 譯, 『독일근대사』pp268∼302, 탐구당
이민호, 『독일사』pp189∼224, 대한교과서주식회사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2.12.10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504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