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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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저항권이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저항권이란
2. 3가지 도전들
3. 적극적이 저항이 일반적인 시민의 의무이다
4.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저항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

본문내용

이 그와 같은 상황에 해당하는 것인가? 군사무기 경쟁이 균형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국가 경쟁을 부추기는 끊임없는 군사력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결코 좋은 결말을 가져오지 않는 한 우리는 전면적인 거부의 결단 앞에 서게 된다. 핵 죽음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투쟁으로부터 스스로 의무감을 갖는 저항이 자란다. 그것은 무장 없이 사는 삶이며 전적으로 폭력 없이 살아가는 평화의 섬김이다.
목적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수단에 있어서도 평화의 수단과 방법들이 퍼져 나가는 평화의 운동이 생겨난다. 산상수훈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인 됨에 대한 숙고가 시작된다. 이것은 국가 시민의 책임성을 뛰어넘는 차원이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이와 같은 확증으로서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정치적인 분쟁으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어떤 분쟁에 뛰어드는 자는 적대의 논리 즉, 보복의 논리에 놓이게 된다. 분쟁가운데 균형은 깨어지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무기경쟁-무기 확장, 무기확장-무기경쟁의 논리가 지배한다. 원수에게 보복의 법칙을 허용하는 자는 결단코 빠져 나올 수 없는 악순환 가운데 빠져들게 된다. 그는 그의 원수의 원수가 된다. 그는 그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한다. 악을 악으로 대처하는 자는 또 다른 악을 불러온다.
우리는 원수를 원수로 갚는 행위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현실에로 방향전환을 하게 될 때에만 이와 같은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일은 적대자를 압박하는 악의 놀이를 떠나 다른 놀이, 즉 하나님의 사랑의 놀이를 하게 될 때 가능하다.
2.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한 것 같이 온전하라”. 여기에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온전성은 완벽주의는 아니고 오래 참은 나머지 창조적인 저 사랑 안에서 성립된다. 그것은 ‘원수사랑’이라 일컬어진다(마5:44). 원수사랑은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함이며 반사적이 아니라 창조적인 사랑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자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반사적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그는 독자적인 계획에 따르며 행동 법칙을 적대자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왜 그는 악을 선으로 갚는가?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원수들을 위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그 책임을 떠맡기 때문이다. 원수 사랑은 바로 ‘주지윤리’(Gesinnungsethik)가 아니라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 ik)의 확신에 찬 모습이다. 만약 모든 현실적이고 가능한 원수들이 제거되어 버리면 평화는 없다. 오히려 원수감정이 사멸되고 극복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있다. 이와 같은 평화는 단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 하셨다(에2:16). 이것이야말로 ‘평화는 복음’이라는 의미다 . 즉 ‘모든 원수들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오는 적대감의 죽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하나님의 온전성은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리라(마5:45)’라는 말씀 가운데 있다. 태양과 비라는 모성적인 상징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며 적대감과 폭력에 대항하여 생명을 보전하신다. 원수사랑은 적대감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생명과 원수의 인격을 향한 사랑이다. 원수 사랑은 원수를 내적으로 파괴하는 적대감의 허용이 아니라 원수됨의 적대감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지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이다. 이렇게 이해되어질 때 축복하는 대신에 원수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것보다 나쁜 일은 없다. 저주, 증오, 적대감은 인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미워하고 저주하고 증오감에 불타는 사람보다 가련한 것은 없다. 마틴루터 킹 목사는 이와 관련하여 알라바마주 버밍함 감옥으로부터 미국 남부의 백인 인종분리주의자들에게 적절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적대감 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종족, 계급, 계층, 민족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창조적인 사랑은 자유에서부터 생겨난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확신은 우리를 원수에 대한 저주로부터 해방시킨다. 우리들은 우리가 위협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모험을 감행할 때 이미 얼마간 자유롭게 된다. 우리들이 비무장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삶과 삶을 긍정하고 창조적인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게 된 만큼 우리는 더 자유롭고 더 여유 있게 될 것이다. 오직 알지 못하고 압박을 주는 것만이 우리에게 공포심을 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마지막 질문이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직 가운데서 이 같은 원수사랑은 독특한 기독교적인 가능성인가 아니면 이 계명은 일반적인 요구와 연결되는가?
후스파들과 메노나이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직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상수훈이 기록된 마태복음 5:1에 따르면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무리들’(ochlos)에게 말해졌고 그리고는 모든 남자와 여자들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산상수훈에는 이 세계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법칙에 관한 것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오고 있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요구(Anspruch)를 가진다. 평화로운 수단을 지닌 평화섬김과 폭력 없는 원수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유롭고 정당하고 연대성을 가진 평화사회이다. 이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서 이 같은 평화사회만이 하나님 나라에 일치한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직의 삶 가운데서 산상수훈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적인 소종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구원의 길이다.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정의, 그리고 생태적인 균형을 지닌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군사적이며 생태적인 인류의 재난에 대한 유일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러한 사회를 위해서는 시민적인 불복종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며 적극적인 저항을 위한 비장한 참여를 각오해야 한다. 그와 같은 사회를 위해서 우리들은 규정들과 헌법 개혁뿐만 아니라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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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2.12.20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6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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