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왕건의 왕권강화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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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신라말 사회동태

Ⅲ. 고려의 건국과 왕권강화책
1. 혼인정책
2. 사성정책
3.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
4. 서경제도
5. 태조후의 왕권강화

Ⅳ.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력을 숙청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자, 영어(囹圄)가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그 발단은 다음과 같다.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대대적으로 이들을 귀양보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조그마한 빌미라도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연루시켜 감옥에 가두거나 무고하게 살육하는 일이 많아졌다. 즉 왕권안정 및 강화에 대한 강렬한 집착으로 호족세력은 물론 혈육 및 친인척에 대하여도 항상 경계하고, 일단 의심이 생기면 살육을 주저하지 않아,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 죽였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추진에 필요한 독자적인 세력기반 육성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958년부터 과거제도를 실시하였고, 독자적으로 시위군졸을 육성하여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왕권안정에 대한 집념은 매우 강렬하여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과 친인(親姻)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적대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고,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 비명에 죽게 하였다. 왕권강화책 추진에 필요한 독자적인 세력기반 육성에 주력하여,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군사력인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으며, 이와같은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족을 비롯한 여러 세력의 반발도 거세었다. 이에 왕권강화책을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보다 광범위한 세력기반 구축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963년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갔다. 이곳의 승려 균여(均如), 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에 반감을 가진 일반민중들을 회유하고, 이들을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랜 재위기간에 걸쳐 왕권강화책이 추진되면서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은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놓여졌다. 이러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이름하고, 만년에는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썼다.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 집념,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자신감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에 기초한 국가체제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지만, 동시에 한계성도 나타났다.
첫째, 그 성격이 개경의 중앙정부 중심으로서 왕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여 지방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둘째, 호족세력의 숙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지만, 그들의 철저한 굴복과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이는 경종 즉위 초에 있었던 대대적인 반광종운동이 일어난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는 왕권강화책 이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안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가지 시책을 펴나갔다. 968년에는 승려 혜거(惠居)를 국사로,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 왕사제도의 단서를 열었다. 또한 국방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경선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확장시켰고,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도 강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인해 고려왕조는 왕권을 중심으로 여러 정치세력과 함께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왕권강화에 따라 귀족(貴族)들은 일부는 왕실(王室)이나 문중(門閥)끼리 혼인하는 수단이던가, 과거(科擧)라는 수단을 통해 중앙관료(中央官僚)의 길을 걸어 귀족사회(貴族社會)를 형성하였다. 이 고려귀족사회(高麗貴族社會)를 형성하는 기여한 국가적(國家的)으로 공인된 두 가지 제도(制度)가 있는데 음서제(蔭敍制)와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었다.
음서는 중앙관료로의 길을 공음전시법은 귀족의 경제적 기반(基盤)을 가졌다 주었다. 고려는 결국 지방의 호족세력을 흡수하면서 또 다른 대안(代案)을 제시하였는데 중앙관료로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신(功臣)등 대호족(大豪族)들은 중앙(中央)으로 진출하면서 그들 나름의 문벌(門閥)인 귀족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조 사후의 치세는 태조가 시행하였던 정책이 없었더라면, 힘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호족이라는 지배세력(支配勢力)이 또 다른 이름의 귀족이라는 지배세력이 되었고 고려는 이 귀족사회라는 새로운 안정된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왕권과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으로 왕권은 명분을 귀족권(貴族權)은 실리를 얻었고 이에 대한 절충된 제도가 귀족사회였던 것이다. 고려 건국 초에 호족연합국의 성격으로 시작해서 귀족사회로 들어서는 것은 중앙집권국가로서의 자리를 완연히 잡았다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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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1281∼1283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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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6
  • 저작시기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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