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의 모든 것...(화성행궁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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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축성의 동기

2.축성계획과 조영

3.수원성의 여러 시설들
1)성벽
2)성문
3)암문(暗門)
4)수문(水門)
5)장대(將臺)
6)공심돈(空心墩)
7)각루(角樓)
8)포루(砲樓)
9)포루(鋪樓)
10)봉돈(烽墩)
♧화성행궁(華城行宮)

4.수원성의 특징과 그 의미
1).수원성의 특징
2)수원성에 설치된 새로운 방어시설
- 치성과 포루
- 공심돈
- 노대와 각루

5.오늘의 수원성
1)20세기 수원
2)복원사업
3)세계문화유산 등록
4)도시 문화재로서 수원성과 21세기 수원

♧참고자료

본문내용

본래 네모난 성벽의 네 모서리에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수원성과 같은 지형조건을 살린 불규칙한 성곽에선느 역시 지세를 살펴 가장 각루의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는 곳을 선택해서 짓게 되었다. 그 결과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조성되었다.
5.오늘의 수원성
1)20세기 수원
한때 정 2품 유수부는 어느새 평범한 한 지방도시로 전락하였다. 일본 식민통치기간 동안에 교통의 요지로 자리잡은 수원은 시민지 수탈의 운송지점으로 이용될 따름이었다. 다행히 이 기간에 다른 지방 대도시에서 시가지 확장이란 명목으로 성벽이 모조리 철거될 때 수원성곽은 화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6.25 동란이 터지자, 전쟁의 길목에 있던 수원 성곽은 포탄 세례를 받았다. 60년대초가 될 때까지도 수원은 혼란의 와중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정기 시내의 중요한 시설이 하나하나 사라졌다. 우선 행궁이 철거되었다. 행궁자리에는 도립병원이 들어서서 봉수당을 비롯한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병원시설을 지었다. 객사는 그 전에 이미 신풍초등학교로 전용된 후 였다. 병원과 학교사이에서 유일하게 낙남헌이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수원의 성벽이 헐리지 않았던 것은 철도가 성외각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축성시 남문이나 북문의 성문을 큰직하게 만든것도 도움을 주었다. 워낙 넉넉히 세워 원만한 자동차는 거침없이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5년 후 한국전쟁으로 교통의 요충이었던 수원은 말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장안문의 문루가 포격을 맞아 한쪽 편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결국 장안문의 문루는 철거되었으며 그후 석축에 홍예문만 남은 채 한동안 존속할 수 밖에 없었다.
2)복원사업
성곽수리는 1964년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74년 정부주도의 국방문화유산 정비계획에 다른 예산 지원에 의해 5년에 걸쳐 대대적을 추진되었다.
정비는 크게 없어진 건물의 복원, 무너진 곳의 보수, 그리고 주변정화사업등 세가지로 구분되었다. 복원은 장안문과 창룡문 문루를 비롯해서 각루 3개소, 포루 5곳, 포루 5곳, 공심돈 1개소 등 중요한 시설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성벽의 상부인 여장은 전체 성벽 5.4㎞ 중에 4.5㎞나 복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수를 한 곳은 팔달문과 화서문의 문루 외에 화홍문, 동장대와 서장대, 성벽 등이었다. 주변의 저화는 성벽에 인접해 있는 민간의 주택을 사들이고 순환도로를 개설하고 하수도를 정비하고 새로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이 정비 계획은 1979년 당시 32역 8.000만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복원하고 한 15년, 북수문과 남수문을 잇고있고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개천을 복개하려는 사업이 벌어진 것이다. 개천복개안이 제기되었을 때 반대가 많았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슬그머니 계획을 바꿔 진행하였다. 성안의 개천 전체를 복개하지는 않고 개천 중간부분의 다리 매향교에서부터 남쪽만 복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원시에서는 더 이상여론에 귀기울이지 않고 공사를 강했해버렸다. 반쪽짜리 개천이 남게 된 것이다. 이 개천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정조가 궁벽한 산골에 있던 수원을 팔달산 아래 삼남의 요로로 옮겨놓고 나서 힘들게 준천사업을 펼친 끝에 생겨난 개천이다.
3)세계문화유산 등록
수원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재되었다. 1972년에 유네스코가 전 세계에 있는 인류문명의 중요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에 대하여 이를 보호, 보존하고 소개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선정한 대상을 가리킨다.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산의 역사성과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것이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유지, 관리되고 있는가 하는 진실성(authenticity)이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
수원성은 1970년대에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시 그 복원 과정에서 얼마나 진실성이 유지되었는지가 평가의 관권이 되었다. 화성은 많은 부분이 복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결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성에는 복원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21차 총회에서 "화성은 동서양의 발달된 과학적 특징이 통합된 18세기의 동양 성곽을 대표하는, 군사 건축물의 뛰어난 사례로 평가" 된다며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결정하였다.
4)도시 문화재로서 수원성과 21세기 수원
1980년대 이후 수원은 비약적인 인구증가와 면적 확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행스런 점은, 도시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수원은 비교적 구 도심부와 신시가지가 어느 정도 구분되면서 구 도심부의 유적이나 도시 골격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수원성의 성곽이 보존되 것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고, 미처 도시가 팽창하기 전에 성곽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성곽의 주변을 정비한 행정적인 노력이 큰 역할을 하였다. 수원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수원의 문화와 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수원 도심부에는 지금도 옛 골목길들이 대부분 남아있다. 기와집이 늘어서 있던 모습은 아니지만, 성곽을 건설한 당시 조성한 200년 전의 신작로가 거의 본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행궁의 좁은 골목길도 아직 살아있다. 대천이란 이름으로 흐르던 수원천도 지금 그 모습 그대로 흐르고 있다. 이런 골목길을 살리고, 냇물을 가꾸고 다스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성곽의 보존과 함께 도시의 내부를 가꾸어 나가는데 지혜와 노력을 모은다면 200여년전의 정조가 건설한 계획 신도시 화성은 미래에도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참고
김동욱,《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수원성》, 도서출판 발언, 1996
김동욱,《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돌베게, 2002
박종길,〈수원성곽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74
http://miyeon.hotcity.net/
http://www.suwon.ne.kr/submain3_frame.asp?TopID=sub0303&MenuID=sub0303

키워드

수원성,   행궁,   화성,   문화재,   ,   복원사업
  • 가격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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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5.28
  • 저작시기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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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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