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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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슬픈아일랜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나라.

2.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고독

3. 두 문명의 전투 : 영국계 아일랜드 문화와 게일문화

4.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

5. 신화에서 역사로

* 느낀점
* 도표

본문내용

북아일랜드의 각 집단들이 각각 다른 역사 해석에 매달리기 때문에 야기된 결과가 바로 현재 상황이라고 한다면, '역사 바로 보기'는 아일랜드적인 것의 다양성이 경쟁적이고 배타적이기보다 서로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를 보다 쉽게 포용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축적에 의해 쌓인 복잡한 정체성의 다층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히 레토릭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응으로 간주될 때, 북아일랜드 문제는 진정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 느낀점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제목을 보고는 도대체 왜 아일랜드라는 국가명 앞에 슬픈이라는 단어를 붙였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히 슬픈이라는 말을 국가명에 쓰는 경우는 지금까지 본적이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사뭇 놀랐다. 조금씩 이 책을 읽어가면서 왜 슬픈이라는 단어가 아일랜드 앞에 들어갔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는데 슬픈 보다는 다른 단어가 이 책의 내용을 나타내는데 더 좋을 듯 싶다. 아마도 이 책의 판매부수량을 늘리기 위한 제목에서의 호기심 유발 때문에 출판사에서 택했을 거라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책제목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읽기 전부터 슬픈 감정을 유발케해서 썩 슬퍼지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아일랜드가 우리 나라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고 말한다. 음악과 춤, 술을 즐기는 성향, 정열적이고 감정적인 민족성, 자기 민족이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과 자신들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 그리고 실제로 강대국 곁에서 겪은 한(限)과 수난의 역사 등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흡사한 모습을 지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욱더 내게 다가온 것은 영국계 신교도 아일랜드인의 이중성이었다. 영국에서 이주하여 점차 토착인으로 귀화되어 가면서도 영국과의 유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영국계 신교도 아일랜드인의 모호하고 불안정한 민족적 정체성이 가지는 역설적인 모습은 지금도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찬 우리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유교적 가치관과 서구의 합리적 가치관, 토속신앙과 기독교적 문화,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적 사고, 이러한 모든 혼란투성이의 것과 영국계 신교도 아일랜드인의 정신적 혼란을 빗대어 생각이 들었다.
▣ 대기근을 통해 바라본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현재의 정통 학설은 대기근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 가지 요인이 낳은 비극적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첫째, 예견할 수 없었던 생태학적 우연. 둘째, 희생자를 구원할 태세를 갖추지 않은 이데올로기. 마지막으로, 대중의 빈곤이다. 영국인들은 기근을 '신의 섭리'라며 오로지 감자 마름병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전역이 비슷한 흉작을 보였지만, 아일랜드에만 기근이 들었다.
대기근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 외에도 다양하다. 대기근을 많은 재앙의 원인 중 압제자의 착취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그것이 아일랜드인의 민족적 사고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이점만으로도 대기근을 충분히 검토할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대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장 고통받기 쉬운 위치에 있던 빈민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그리고 의사, 성직자, 그리고 구제관리들 역시 전염병에 걸려 많이 죽었고, 아주 어린 아이들(5세이하)과 장노년층(40세이상)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아일랜드의 재앙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1845-1850년까지 재무성이 지출한 구제사업비는 810만 파운드였으나, 그중 절반 이상이 아일랜드가 되갚아야 할 차관 형식으로 제공되었다. 1853년 당시까지 남아 있던 부채를 전부 무효로 한다는 조치가 발표되었을 때, 계산한 순수 지출은 700만 파운드였다. 그것은 영국의 5년간 국민총생산의 0.5%로 안 되는 액수였다. 당대 사람들은 그 액수가 1830년대 서인도 제도의 노예소유주에게 지급한 2000만 파운드의 보상액과 엄청난 대조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1854-1856년의 크림 전쟁에 쏟아부은 7000만 달러의 전쟁비용과는 비교가 안 되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대기근의 손실 만회를 위해 영국보다는 아일랜드에서 더 많은 모금되었다. 구빈세와 지주들의 차입금이 850만 파운드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이 나라의 자원을 최대한 짜낸 액수였다.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를 돕는데 그 이상의 돈이 지출되지 않았던 것은 이데올로기의 강박이 인도주의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대기근은 근대 아일랜드 형성의 주요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중요한 사회변호가 1845년 이전에도 많이 일어났지만, 대기근은 오늘날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형성했고 또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대기근 이후, 아일랜드는 19세기 유럽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처럼 특이한 인구통계는 다른 어느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며, 그토록 끈질긴 악몽에 시달린 나라 또한 없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해외로 떠나보낸 나라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대기근은 오늘날 아일랜드에 남겨놓은 의미는 복잡다기한 무엇이고 또한 아직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특히 폭력적 적대행위로 얼룩진 북부 아일랜드의 공화주의자들에게 대기근이란 영국인의 아일랜드인 탄압의 최종 단계이다. 1960년대 이후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아일랜드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대기근의 이미지가 차츰 흐려지고 있지 있다. 아일랜드의 대중을 과거의 신화에서 떼어놓고자 열심인 '수정주의'역사가들은 대기근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견해는 그 재앙에 대한 진지한 연구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대기근의 기억은 아일랜드인의 정신 깊은 곳에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지금의 아일랜드를 만든 힘이라는 것이다.
▣ 도표 ① 1844-1849년의 감자 관련 통계자료
감자 재배면적(단위 100만 에이커)
▣ 도표 ② 대기근시 주별 연간 평균 초과 사망률 (1846 - 1851) 연간 사망자수(주민 1,000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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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3.10.13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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