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하나라에서 제자백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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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중국역사개관(하~제자백가)
하 [夏]
고대의 중국
노예제사회 [奴隸制社會, slavery society]
중국의 노예제
주 [周] (BC 1046~BC 771)
봉건제도 [封建制度, feudalism]
동양의 봉건제도
종법 [宗法]
정전법 [井田法]
군현제 [郡縣制]
춘추전국 [春秋戰國]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제자백가 [諸子百家]

본문내용

없었으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춘추'와 '전국'이라는 두 시대로 굳이 구분하는 이유는 혼란의 양상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천자의 권위가 춘추시대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존왕양이와 봉건제도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그 기틀이 무너져 전쟁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종전 170여 제후국이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7개 국으로 줄어들었다. 전쟁이 그만큼 치열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춘추전국'이란 말이 나왔으며, 오늘날은 강자도 약자도 없이 혼전을 거듭하여 승패나 순위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을 일러 춘추전국이라 부른다.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 ·위(魏) ·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정치】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 ·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여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사회경제】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 ·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 ·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 ·군사 ·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사상】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 ·인의(仁義) ·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 ·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 ·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자백가 [諸子百家]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말은 제선생이란 뜻이고, 백가란 수많은 파별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 중에서 옛 서적을 분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별은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論理學派)·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外交術派)·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는데,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 ·장자 등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만큼 극히 활발한 상황을 나타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아야 한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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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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