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를 읽고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에서의 천황의 의미

Ⅲ. 천황제의 개념과 의의

Ⅳ. 히로히토와 일본

Ⅴ. 결론

본문내용

통한 통신은 전체 공간을 거미줄 엮듯이 만들어 놓은 쾌거로서 한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완공은 어떤 면에서 보면 발신 기구의 연결이라는 뜻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한편, 궤도상의 거점을 확보했다는 주목을 받았다.
3. 히로히토의 전쟁책임론
1989년 12월 모토시마시장에 의해 천황의 전쟁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이 나왔다. 이 발언은 회의시간에 나온 것으로 「외국의 서적 일본의 역사, 나 자신이 군대에서의 교육관계의 일을 한 것에서부터도 천황의 전쟁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 헌법에서 상징으로 되어있는 이상 그러한 해석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사회에서는 거의 금기시 되어있는 내용을 그것도 자치단체장의 수장으로서 이례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언을 공적인 장소에서 언급한 것에 의해 모토시마시장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발언에 대한 편지가 무려 7300여통이 왔다고 한다. 7300여 통의 편지 중 가운데 95%정도가 모토시마 시장의 발언을 지지하고 있고, 그 지지내용도 대부분 다음과 같았다.
① 시장의 발언에 대한 일본의 우익의 협박이나, 폭력 등의 무모한 행위에 대한 비난과 자민당의 압력의 부당성 및 언론자유의 탄압에 대한 비난 등, 주로 일본사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를 지적하고
② 전쟁은 천황의 이름 하에서 수행되었기 때문에 전쟁책임은 당연히 천황에 있다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으며,
③ 그리고 반전, 반핵사상의 표출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일본인들은 천황의 전쟁책임은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공론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인식은 하더라도 책임추궁은 결코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전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사회적 분위기였고, 이러한 분위기는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의 의견은 7300통 중 5%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이 차지하는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이상이다.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소수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주장하며 천황을 옹호하고 있고, 일본정부도 그들의 움직임을 제지하기는커녕 묵인 내지는 암묵적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일본의 모습이다.
천황과 전쟁책임 문제는 일본인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해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천황 한사람에게만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고, 전쟁전의 천황제를 포함한 국가체제 전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세계 3대 전범으로 꼽히는 히로히토가 63년 동안이나 일본을 통치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게다가 천황이 면책받는 대신 태평양전쟁을 막기 위해 애썼던 히로타 고키 총리와 남경학살의 주모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마쓰이 이와네 장군 같은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까? 저자는 이 모든 일이 영민하고 교활한 히로히토 천황의 이미지 조작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서려 했던 맥아더 장군과, 천황에게 기꺼이 면죄부를 주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막을 보루로서 일본을 확보하게 된 워싱턴 고위 정책당국자들의 계산이 작용했다. 히로히토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아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 때 천황은 육군의 만주 점령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전면전으로 가기 전 육군의 출동을 제한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재량권이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상 부하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는 방식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 1936년 젊은 장교들이 2 2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진압작전을 지휘하고 연루자들을 처단하는 히로히토는 용의주도했다. 2 26 쿠데타 이후 그는 호전적인 육군에게 해외라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공산화돼 가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계획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히로히토는 예년과 다름없이 여름 별장지 하야마 해변에서 해양생물을 채집하며 휴가를 즐겼다. 히로히토의 이러한 위장술은 외교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미국이나 영국과 손을 잡는 듯하다가 어느새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쪽으로 선회하는 노회함을 보여주었다.
Ⅴ. 결론
이상으로 히로히토에 대한 나의 감상문을 써 보았다. 분량이 많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히로히토에 대한 인물평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본에서의 천황제의 의미를 살펴 보는 것도 논지의 흐름을 매끄럽게 한다고 사료되어 이 같은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일본의 현 천황제의 유지는 비단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일본국민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국민 화합과 단결에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 세계 어디서나 '덴노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을 하는 일본인들의 죽음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5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기록에서 시종일관 천황으로서의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론을 거론한다.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도조 히데키가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말에 귀 기울여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안겨준 1945년 8월 15일 종전연설문에는 단 한 번도 '항복'이나 '패배'와 같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마치 세계평화를 위해 종전이라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뉘앙스의 연설문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말한다. 이 종전연설문이 히로히토 천황이 보여준 최고의 위장술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Ⅵ. 참고문헌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2001,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무궁화와 사쿠라(21세기 한국과 일본의 이해) - 조선대학교 출판부,김인현 지음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 창작과 비평사,후지와 쇼오조오 지음,이홍락 옮김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4.04.19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698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