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 윤휴의 정책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백호 윤휴의 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윤휴의 북벌론

Ⅲ. 윤휴의 정치제도론

Ⅳ. 윤휴의 대민책
1) 윤휴의 경제 정책
2) 윤휴의 사회 양민론

Ⅴ. 맺음말

본문내용

데 이것은 유랑민과 도망민을 더 많이 생기게 하여 민생을 곤궁하게 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윤휴는 61세 이상의 사람과 15세 이하 어린이에게 군역을 면제하고, 죽은 이를 명부에서 삭제하며, 도망자로 인한 족징과 인징을 폐지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역으로 인한 도망 등은 그 원인이 수령의 탐학에 있으므로, 그 신역에 상당하는 것을 수령의 봉급에서 보충하도록 하여, 인징과 족징이 없어지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白湖全書』, p. 581-583 윤사순, <위의 글>
또한 윤휴는 호구와 호적조사가 제대로 시행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는데, 시행방안으로써 오가통법(五家統法) · 지패법(紙牌法) · 호포법(戶布法) · 상평법(常平法) 등을 제시하였다. 이들 방안은 소농민(小農民)의 생산을 보장하는 동시에 전신분계층을 국가의 공권력 체계 속에 포섭시킬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방안이었다.
정호훈, <위의 논문>
윤휴는 오가통법 · 지패법이 온전히 실행될 때 장차 주대(周代)의 정리(井里), 맹자(孟子)가 말한 경계(經界), 관자(管子)의 내정(內政)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전망하고 있었다.
오가통법은 도성 내외의 사착(士着) · 유민(流民)을 불문하고, 민호(民戶)를 정확히 파악하여 호적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제도이기도 했다.
「肅宗實錄」, 券 3, 肅宗 元年 5月 丁卯, 38-272ㄷ 정호훈, <위의 논문>
또한 오가통법은 종래의 법제와는 다른 몇 가지 원칙 하에 제시되었는데, 먼저 향촌사회의 지배층이었던 사족층을 군현제(郡縣制)-면리제(面里制)-오가통제(五家統制)로 이어지는 공적 권력 체계로 포섭, 지배하여 향촌사회에서 이들이 누리는 특권 · 역할을 국가가 하고자 한 점이었다. 이는 신분제와 경제력에 기반하여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이 시기 재지세력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 힘을 활용하면서도 국가 권력 체계로부터 일탈되어 있던 이들 사족을 적극적으로 관속 · 제어하는 방법이었다. 조세징수(租稅徵收), 역역(力役) 징발(徵發) 등 수령(守令)의 지휘를 받아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이들은 실제 관임화(官任化)될 수밖에 없었으며, 국가의 원활한 향촌 장악은 이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白湖全書』, 上, 券 14, p.588 정호훈, <위의 논문>
오가통법의 이 같은 원칙은 강력한 군주권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의 수립을 위해 민과 토지에 대한 공적 지배력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정치 운영론과도 관련된, 이 시기 신분제에 그의 인식 속에서 나온 논리였다.
정호훈, <위의 논문>
윤휴가 제안한 지패법은 '제민편호(齊民編戶)'의 방법으로써, 당시 시행되던 호패법(戶牌法)의 폐단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였었다. 그러나 당시 정론가들 대부분은 지패법보다 호패법이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에서 지패법을 호패법으로 바꾸자고 촉구, 1677년(숙종 3) 3월부터 이를 시행하도록 했다. 윤휴의 주장으로 지패법이 시행된 지 약 1년 6개월 만의 일로, 호패법은 인민의 실수(實數)를 남김없이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귀천(貴賤)의 구별을 명확히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각 신분별로 차등을 두어 패를 만들어 패용하면 이를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신분을 벗어난 피역 행위를 쉽게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 호패법이 갖는 장점이었다. 그러나 윤휴는 이러난 호패법이 비록 그러한 효과가 있다할지라도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인심물정(人心物情)'을 무시한 처사이며, 종래에는 민의 반대로 폐지될 것이라 하여 그 시행을 반대하였다.
정호훈, <위의 논문>
윤휴가 제안하고, 일부 시행되었던 사회경제정책은 국가가 사적 권력의 우위에서 조선 사회 전반을 다스려야 한다는 국가중심적 사고에서 연원한 것이었다. 또한 윤휴는 당시 조선 사회가 피폐해져 있는 원인들을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윤휴의 사회경제정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사적 권력의 약화가 주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무엇보다 민들의 어려움을 경감하는 데에 개혁의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Ⅴ. 결론
이상으로 본고에서는 윤휴의 실천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정책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실상 59세의 나이로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죽을 때까지의 6,7년 동안 그가 남긴 정책들은 실로 방대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업적은, 그가 사문난적이라는 실로 엄청난 비난과 함께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왕조가 쇠망한 뒤인 1927년에야 비로소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사상과 업적만을 가지고 '근대'의 개념을 이끌어 낼 수는 없지만, 후대의 실학자(혹은 북학파)들에게 계승되어 17세기에 나올 수 있었던 사상과 업적과는 다른 성격의 실학적인 사상의 계보를 뚜렷이 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 안병걸, <白湖 尹 의 實踐的 經學과 그의 社會政治觀>,「조선후기 경학의 전개와 그 성격」, 1998,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 윤사순, <윤휴의 경세관과 근대정신>, 「기호학파의 철학사상, 1995,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예문서원
* 정호훈, <白湖 尹 의 現實認識과 君權强化論>,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학림, 1994
* 정호훈, <尹 의 經學思想과 國家權力强化論>,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995
* 정호훈, <朝鮮後期 '異端' 論爭과 그 政治思想的 意味-17세기 尹 의 經書解釋과 宋時烈의 批判->,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2001
* 곽신환, <송시열의 학문과 자주 의식>, 「기호학파의 철학사상」,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예문서원, 1995
* 황의동, <기발리승일도설의 심화와 대의의 실천-송시열>, 「율곡학의 선구와 후예」, 예문서원, 1999
* 최석기, <白湖 尹 의 經學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연구, 1998
* 이선아, <白湖 尹 에 대한 斯文亂賊說 檢討>,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1998
* 한우근, <白湖 尹 硏究>, 역사학회, 역사학보, 1961
* 안병걸, <백호 윤휴의 實踐的 中庸觀 Ⅱ>,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퇴계학, 1991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6.05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422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