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9년 예송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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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1) 문제제기
2) 선행연구의 검토

2. 예송의 발생배경과 주요쟁점
1) 예학적 배경
2) 예송의 주요쟁점

3. 기해예송의 발생과 전개
1) 효종의 죽음과 복상논쟁
2) 윤휴와 송시열의 논쟁
3) 송시열과 허목의 논쟁

4. 예론의 정치분쟁화
1) 윤선도의 복제상소
2) 윤선도의 복제상소에 대한 논쟁
3) 예론의 법금

5. 조선사에서 예송이 갖는 의미
1) 예학적 의미
2) 정치적 의미

6. 결론

본문내용

또한 양측의 정치론에도 나타나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사대부의 정치참여를 정당시하여 군주성학론, 세도정치론, 붕당론등을 주장한데 반해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은 당시의 붕당폐해를 인식하여 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인 지배체제 구축을 위해 의정부 복구론 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론을 통하여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정치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것이고 반면 남인들은 인조 이후 약화일로에 있던 왕권을 옹호하며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실의 특수성에 입각하여 삼년설을 주장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무엇보다도 조선사에서 예송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역시 정치구조의 변화에 있다. 흔히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정국은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인이 견제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조, 효종연간의 정국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서인 내부의 대립이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인조대의 공서와 청서, 효종대의 산당과 한당이 그것이다. 남인은 인조반정 이후 소수파로 정권에 참여하였지만 항상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서인정권이 강화되어 가면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다. 효종대에 일부 남인이 요직에 진출하긴 했지만 그 세력은 아직 미비한 수준이였다. 중요한 것은 이 당시에도 물론 붕당간의 대립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당의 존재와 의견을 존중하는 상호비판과 견제라는 측면에서 운영되는 공존체제였다. 정원영, 앞의 논문, p.140
그러나 이러한 붕당간의 상호 공존적 측면은 예송을 거치면서 붕괴되는데 이전과는 달리, 상대당이 비판세력으로 공존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형세로 바뀌게 된다. 현종 15년에 기해예송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갑인예송으로 인하여 인조반정 이후 초유의 정권교체를 가져왔고 이후 50여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나며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기해예송은 조선후기 당쟁의 격화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6. 결론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은 17세기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고 예제의 보급과 예속화가 보급되면서 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해예송이 발생한 것이며 이것이 조선후기 정치 및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기해예송에서는 붕당을 매개로 한 사림세력간의 갈등 양상이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적 명분론의 뒷받침을 받는 예론을 이념적 근거로 삼아 명분을 독점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의 내면상 으로는 각 정파가 제기한 예론과 그 명분은 최고정치권력의 향방과 관련된 이해관계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었다. 당시 효종이 승하한 직후 최고정치권력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대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의 복제와 같은 국가전례에 관하여 유권해석을 내려야 할 자의대비의 입장을 살피고 고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즉 집권 서인 송시열은 대비의 입장을 고려하여 모자간의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기년설의 예론을 제기했던 반면, 야당인 남인 윤휴는 훗날의 정치세력의 재편을 위해 당시에는 세자인 유충한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명분을 우선시 하는 삼년설의 예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갈등의 해결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당시 현종은 유충한 보령이었고, 서인 정국이었던 만큼 체제의 안정을 위해 집권세력의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서인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국정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고, 예학의 대가였으므로, 국가의례인 왕실의 상례에 대해 이들의 학문적, 정치적 권위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기해예송에서 현종은 서인이 제기한 기년설을 지지하게 되고 그 결과 서인이 승리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기해예송은 단순한 학문적 대립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또한 당시 신권과 왕권의 균형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구도 하에서 형식적, 이념적 최고권력자인 군왕을 매게로 한 상호 견제 심리에서 파생되어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전개한 예론은 단순한 왕실복제의 절차와 기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양난이후 사회, 국가질서 재건 방략을 모색하는 인식논리의 반영으로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예론이 당시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예송은 17세기의 예치를 학문적인 견해차이 및 정치이념이 수반되어 나타났기에 문치주의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체제논쟁적 성격을 띄었던 것이다.
기해예송은 또한 이후 조선의 정치사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의 붕당은 상호공존의 측면하에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으나 기해예송이후 상호공존의 측면은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후에는 상대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당쟁이 격화되어 정국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즉 예송은 조선의 붕당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조선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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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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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상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속대학원, 1984
홍윤선, 「조선 현종대의 왕권과 신권」, 연세대 교육대학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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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아, 「17세기 예송에서 “장자, 서자”에 관한 논의」, 고려대 교육대학원, 1996
금지윤, 「17세기 예송논쟁과 서인의 집권 과정」, 상명대교육대학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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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27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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