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 또는 잃어버린 왕국을 읽고 전통 시대 생활상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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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경제 활동

2) 사회 문화 풍습

3) 국외(중국) 및 특수한 지방, 계층의 풍속

본문내용

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종교적인 미신 -붉은색을 선호
붉은 색깔은 전통적으로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다. 중국에서 붉은 빛은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적인 색이며 또한 복을 가져오는 행운의 색을 상징한다. 따라서 보통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복을 빌기 위해 붉은 옷을 입힌다. 또한 호랑이의 모습이 새겨진 가죽신을 신고 신기기도 하는데, 이 모두 무병을 기원하고 호랑이의 힘을 빌러 액운을 물리치려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다.
ㅊ)남아선호사상
붉은 달걀./ 물감을 들이는 붉은 종이와 함께 계란을 끓여 만드는 붉은 달걀. 그것은 아들을 낳았을 때 붉은 달걀을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는 중국의 독특한 풍습이었던 것이다.
③심마니들의 생활
보통 산삼을 캐러 산으로 떠나는 때는 초가을이고 심마니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늦가을이었는데, 그들은 머리에는 노캇(종이 짠 모자)를 쓰고 굴걸피(옷)으로는 이슬치(겉바지)를 걸치고 디디게(신발)을 신고 마내시리(지팡이)를 짚었다. 메대기(배낭)에는 배낭인 메대기 속에는 주청이(도끼)와 인기리(낫)와 허버기(호미) 같은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험한 산길을 다니기 위해서 이런 물건들을 휴대하고 있었고 산삼을 캐내기 위해서도 이런 도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④ 의주의 풍습
의주 사람들은 을파소의 묘당을 만들고 그를 숭상하여 대대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곤 했다. 일대는 예부터 '흙굿재 기와'라는 특산물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⑤상류층의 취미 활동
주로 시를 쓰고 그것을 즐겨 주위 사람과 함께 노니는 것이었다. 해서 자신이 쓴 시를 모아 책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은 임상옥이 저술한 책에 대한 극중 인물 석전의 설명이다.
"이 문장은 (가포집)이란 책 속에 나오는 글이다. 뒤에 이 책을 쓴 저자는 자신이 쓴 시를 추려서 따로 한 권의 책을 더 만들었다. 그 책의 이름은 (적중일기) (가포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창화시, 즉 시를 읊으면 다른 사람이 받아 노래하는 시인데 이 문장은 만년에 저자가 자영해서 뽑아 추린 (적중일기)에도 함께 보이고 있다. 저자가 직접 쓴 시라고도 하고 혹은 저자가 죽은 뒤 그의 인격을 기려서 주위 사람이 쓴 만시(輓詩)라고도 부르고 있다."
⑥연인들의 사랑 표현
주로 상류층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일로,정분을 나눈 사람끼리 헤어질 때 정을 표시하기 위해서 정표를 나눠 갖는다. 여인들이 입던 치마폭이나 속치마 위에 정분을 나눈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이별시를 적어내리는 것은 선비들 사회에서 보여지는 특징적인 풍류이다.
⑦동지사 사신 일행의 풍습
의주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2 천 하고도 30리의 까마득히 먼 길이었다. 하루에 백리를 꼬박 걸어도 한 달 가까이 걸리는 노정인 것이다. 때문에 이 노정을 상인들이나 혹은 어쩔 수 없이 해마다 동짓날이면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야 하는 동지사(冬至사)들은 '아니 갈 수 없어서 가긴 가되 죽기보다 가기 싫은 길'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2천 리가 더 되어 왕복으로 치면 한 번 다녀오는데 자그마치 8천 리의 먼 길인 것이다. 얼마나 먼 길이었으면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정조 4년(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8월 2일에야 청의 왕도인 연경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서 10월 27일 귀국할 때까지의 중국 여행기를 쓴 박지원은 이 (열하일기)에서 이 여행이 얼마나 고된 노정인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해가 기울어 땅거미가 들자 30여 군데에 횃불을 피워 놓고 톱으로 베어온 아름드리 나무를 먼동이 틀 때까지 계속 집어던졌다. 또 군졸들이 횃불 주변을 돌면서 크게 나팔을 불면 일행 3백여 무리가 일제히 함께 소리를 맞춰 고함을 치는데 이것은 무인지경의 산 속에서 뛰어나올지도 모를 호랑이를 쫓기 위한 것이다.
사신이 국경을 떠날 때에는 압록강 구룡정(九龍亭) 나루터가 조선 땅덩어리의 마지막 언덕이었다. 사행이 떠날 때에는 구룡정까지 평안감사와 의주부윤이 관기들을 데리고 와서 최후의 석별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역관은 역관대로 통인(通引)은 통인대로, 마두(馬頭)는 마두대로 끼리끼리 정을 나누며 석 잔 술을 마시고 배에 올라서면 기생들은 일제히 부채를 펴들고 배따라기를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 풍경과는 달리 사행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이면 압록강변 모래바닥에는 첫새벽부터 출입을 금지하는 문이 세워졌다. 일종의 세관이 설치되는 것이다. 모래바닥에 깃발 세 개를 꽂아 문을 삼고 의주부윤과 서장관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사행 따라 배를 타는 중인 3백여 명을 샅샅이 검색하는 것이다.
금수품을 조사하는 문은 첫째 문, 둘째 문, 셋째 문의 삼문이었다.
그 문 앞에서 웃옷을 풀어헤치고 바지 아래 사타구니까지 검색관이 쓱쓱 훑는데, 찾는 물건은 황금이나 진주, 담비가죽이나 인삼 등의 금수품들이었다.
이 당시의 금법(禁法)은 이런 조문이었다. '첫째 금문에서 발각되면 물건을 압수당하고, 둘째 금문에서 발각당하면 볼기를 까고 곤장을 치며, 셋째 금문까지 숨겨 나오다가 발각되면 목을 쳐서 금문 깃대 꼭대기에 내건다'
국경을 넘어가니까 아무리 사신 행차라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상서(人相書)도 꾸몄다. 성명, 거주지, 나이에다 생김새 등 신체적 특징들을 기록하는, 오늘날의 여권과 같은 호조(護照)였다.
⑧의주의 결혼 제도
그 당시 의주에서는 조혼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그래서 열 살이면 장가를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의주에서는 다른 지방보다 훨씬 일찍 조혼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의주 지방의 조혼 풍습을 나타내는 민요로 '신랑요'라는 노래까지 있을 정도다. 나이 어린 신랑이 자기 아내에게 밥을 풀 때 밥을 달라며 보채는 모습을 놀리는 노래인 것이다.
노랑두 대가리, 물렛줄 상투
샛문턱에 서서 밥 많이 달라구
훌쩍
⑨개성 상인의 갓을 선물하는 풍습
당시 개성 상인들은 귀한 손님들을 만나면 갓을 선물하는 버릇이 있었다. 원래 갓은 말의 갈기나 꼬리 같은 말총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으므로 주로 제주도에서 생산되고 있었으나, 이 갓을 매점하였던 조직이 바로 개성 상인의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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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12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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