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론]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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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요시다의 성장과정
(2) 외교관 시대
(3) 평화활동가로서의 시대
(4) 전후의 재상으로서의 시대
(5) 요시다 내각의 종결
(6) 요시다에 대한 평가
(6) 전후 일본의 주요사건

본문내용

국가 공무원의 단체 교섭권과 쟁의권을 법적으로 금지하려는 정령 201호를 국회에서 통과 시켜 노동운동의 억제를 내각의 방침으로 내비쳤으며, 패전후의 경제적 불안정을 극복해내기 위해 '경제 9원칙'을 받아들였다. '경제 9원칙'의 주요 내용은 극도의 인플레이션을 안정화시키며, 고정환율을 시도해 수출의 촉진과 예산의 균형, 임금과 물가의 통제를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실행을 위해 노동운동의 억제(노동조합에 대한 탄압)를 단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측의 임금 억제와 노동자 해직에 협조적인 조직을 육성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통제력과 정령 201호의 의회통과 국민의 기대심리로 총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요시다 내각은 더욱더 강력한 좌파 노동운동 세력들을 탄압을 단행한다. 급기야 49년 6월에 민간노동조합을 대상으로 정부 중심의 강력한 통제를 근간으로 하는 노동조합법, 노동관계조정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그 동안 강력한 인원정리와 구조조정에 반발해왔던 좌파 노동자세력을 통제하여, 노동자운동 내부의 좌우 대립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좌파세력탄압의 마지막 단계인 레드퍼지를(공산주의자세력의 추방) 정부내의 여러 기관은 물론이고 언론사 민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확산시킨다.(공산당 중앙위원 24명의 공직 추방 이후 10,000 여명의 달하는 인원을 사회에서 이탈시킴)
( 경제 9원칙 : 민주 자유당이 49.1에 있었던 총선거에서 집권하면서 탄력을 받게 되어 본 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른바 균형적 예산심의와 1$= 360엔의 단일 고정환 율제의 시도가 그 대표적인 정책중의 하나였다. 이에따라 인플레이션은 어 느정도 진정되었으나, 관치중심의 대폭적인 구조조정으로 인해서 실업자의 증가와 국내경기의 침체를 야기시켰다.)
한국전쟁과 특수(特需)
ㆍ한국전쟁의 발발
1947년 4월의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다.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담당한 것은 일본 최초의 사건이었는데, 좌우양파의 대립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2월 퇴진했다. 그 후 자유민주당의 요시다시게루 내각이 1949년 1월 총선거에서 대승함으로써 장기적인 안정정권이 확립되었다.
그 동안 한반도에서는 1948년이래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소련을 후원자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미국이 지지하는 대한민국이 대치하여 냉전의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도선을 돌파하여 한국으로 침공을 개시하여 불의에 일격을 당한 한국군은 패퇴하고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소련이 결석한 가운데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무력제재를 결의했다.
1951년 7월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드디어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ㆍ한국전쟁 특수(特需)
한반도의 전선(戰線)에 출동하는 미군은 일본의 기지를 이용했는데, 대량의 군사장비와 물자의 보급은 물론 그 수리도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전쟁 중 4년간의 합계는 23억달러를 초과하여 일본의 자본주의는 1951년 중에 전전(戰前)의 생산수준을 회복했으며, 1955년에는 국민총생산이 전전(戰前)의 2배 가까이로 증가되었다. 특히 철강업을 중심으로 한 분야에서 생산량이 급상승했다. 이로써 불황에 신음하고 있던 일본경제가 일거에 일어서는 전환점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의 성립
미국은 군사기지로 일본을 항구적으로 이용하고 아시아의 반공군사체제에 일본을 편입시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시다 내각과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대해 아시아제국, 특히 전쟁 최대 피해국인 중국과 소련의 반대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강화조약을 회피하고 일본의 장기점령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북한, 중국을 침략군으로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이 원하는 강화조약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결국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에서 강화조약과 일미안보조약이 조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강화조약 본래의 목적인 전쟁처리라는 점에서는 불충분한 조약이었기 때문에 일본 및 여러 국제 사회에서 큰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전쟁의 최대 피해국인 중국에 대한 배상이 없었으며 이후에 이 점은 중국과의 적대적 관계의 큰 원인이 됨)
결과적으로 강화조약, 일미안보조약은 일본을 미국의 극동군사체제하에서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었으며, 미군의 입장에서 일본 내 및 부근에 군사를 배치 할 수 있는 권리를 무기한으로 허용함으로서 미군이 일본에 대해 극동전초기지로써 군사와 자금조달을 조달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의 좌파 세력은 그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1951년 9월8일 일본은 미국, 영국 등 자유주의 진영의 48개국과의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과 연합국간의 전쟁상태는 종결이 선언됐다. 1952년 4월 28일자로 평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연합국군의 일본점령은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여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평화조약과 동시에 조인되고 발효되기 시작한 미,일 안정보장 조약에 의해, 일본 국내 및 그 주변에 미군의 계속된 주둔, 배치가 인정되고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미군은 일본에서 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중화민국, 한국과 함께 미국과의 협력제체 하에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의 블록을 구성하고 소련, 중화민공화국, 북한 등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소위 안보체제의 확립을 추구하는 정부, 여당, 재게 등의 보수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등의 혁신세력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특히 폭력주의적 무장투쟁 방침을 밀고 나가기 시작한 공산당의 영향하에서 1952년에는 메이데이(노동절)사건을 비롯한 소요사건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요시다내각은 파괴활동방지법의 제정 등 치안대책을 강화했다. )
<참고자료>
* 일본을 완성한 지도자들 임용순 편저, 나무와 숲
* 일본사 여행 황인영저, 일본문화 연구센터
* 이야기로 배우는 일본의 역사 양억관 옮김, 고려원 미디어
* 그림과 연표로 보는 일본의 역사
* 인터넷 자료
- www.jacobang.com/school4.htm -
japa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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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20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7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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