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거두 - 춘원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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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의 거두 - 춘원 이광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라는 이름으로(향산은 신무천황이 즉위한 가시와라라는 지방에 있는 산의 이름인 가구야마(香久山)에서 따온 것이라고 스스로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에 밝히고 있다.) 창씨 개명을 하는가 하면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학생들에게 학도병으로 나설 것을 연설하고 다니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그는 가증스럽게도 친일 행각으로 모은 돈을 보존하기 위하여 허영숙과 법률상 이혼하고. 나아가 자신의 친일 행위를 민족 보존책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나의 고백>을 집필하기도 한다. 이후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통과 되자 1949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9년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이광수는 6·25전쟁중 납북되어 1950년 10월 25일 압록강 연변의 만포 인민병원에서 생을 마감 하였다.
지식인이란 많이 알고 있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식인이란 자기가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45년 일제치하속에서 많은 지성인들이 변절을 하였다. 상황이 어려웠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초지 일관하는 자세가 모자랐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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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페이지
  • 등록일2004.10.27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1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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