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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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성황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왜 명성황후인가

Ⅱ 명성황후의 일대기 연보

Ⅲ 식민지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1. 식민사관
ⅰ『한국의 병합과 국사』
ⅱ『조선통사』
ⅲ『李朝 五白年史』
ⅳ 그 밖의 책
2. 해방이후
2-1.명성황후와 대원군

Ⅳ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시도로서의 명성황후 연구
1. 개화기 명성황후 민비의 정치적 역할 재해석
ⅰ 대원군과 민비의 관계
ⅱ 고종과 민비의 관계
ⅲ 민비(閔妃)와 민씨 척족 세력(閔氏戚族勢力)
ⅳ 임오군란
ⅴ 갑신정변
ⅵ 동학 농민 혁명과 갑오개혁
ⅶ 을미사변
ⅷ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할
2. 고종과 명성황후
3.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본 명성황후

Ⅴ 현대사회와 명성황후
1.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명성황후
2. 티비 드라마 ‘명성황후’ 그리고 2001년 한국

Ⅳ 글을 마치며

본문내용

수 있다. 정비석의 소설『명성황후』
정비석의 소설 『명성황후』는 1980년 초판발행 당시 소설 『민비』였으나 1995년 제목을 『명성황후』로 바꾸었다. 이는 명성황후에 대한 시대의 평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권의 목차(여걸의 탄생/쾌활한 여장부/…/무능한 군신들/…/칼을 가는 중전/대담한 계책)를 보면 그 내용을 보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만큼 소설적이다. 여기서 명성황후는 총명하고 아름답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그려진다. 역사소설은 그 소재가 역사인 만큼 그리고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 매체인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물론 명성황후 나아가서는 우리 근대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위와 같은 감상적인 소설 류의 난립은 그것의 재미를 떠나 우리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지 못한 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대개의 소설에서는 앞에서도 계속 지적한 바와 같이 식민사관의 잔재인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음모와 배신-구도가 혹은 민비와 경호대장의 사랑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 정비석의 말처럼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은 명성황후를 소재로 하여 작품을 쓰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정비석,『명성황후』,고려원,1995 작가의 말에서
하더라도 '그녀의 생애가 단순한 흥미의 대상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우리는 구한말의 역사적 비운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
상동
에 소설로서 명성황후로의 접근은 더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 티비 드라마 '명성황후' 그리고 2001년 한국
명성황후는 우리 근대사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알려진 바대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과 비참한 최후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예술작품 등을 통해서 형상화되었고, 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왜곡이든 그 왜곡의 극복을 위한 연구이든 간에 명성황후는 그 평가가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이러한 와중에 최근 일본은 역사교과서 왜곡파동을 통해 다시 한번 국민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 일본은 왜곡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 명성황후는 이러한 국민감정의 상징으로 이번에는 티비 드라마를 통해서까지 이용되고 있다. 방송사 측은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차에 이 분위기를 이용하려 드는 듯하다. 내용자체도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 태도보다는 인물들 모두를 영웅시하려는 면을 보임으로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드라마의 인기열풍을 등에 업고 톱스타 - 명성 황후 역을 맡은 이미연은 최근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 를 기용하면서, 재미위주의 편성으로 끌고 간다면 이것은 우리 근대사의 연구나 대중의 역사인식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반작용이 일어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의 근대사가 정확히, 객관적으로 복원되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처해야 함도 마땅하다. 티비 드라마 '명성황후'는 지나치게 픽션위주로 갈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줌으로서 역사의 진실 밝히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Ⅳ 글을 마치며
식민지시대로부터 해방이후까지 식민사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근대사 연구는 이제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이 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에 대한 연구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세 사람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우리 근대사에 대한 왜곡을 벗겨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여 그녀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서 몇가지 결론에 도달 하였다.
첫째, 대원군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둘은 단지 감정대립으로 권력투쟁을 일삼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명성황후의 정치적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감정대립은 "고종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드러나고 있으나 이러한 단서로 일제하 식민사가들은 그것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의 전체인양 왜곡시겼다. 위에서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재조명해 본 바와 같이, 오히려 그 둘의 대립은 감정적인 결과가 아니라 당시의 특이한 정치 역학구조 - 부자 관계로서 고종과 대원군의 직접적인 정치적 마찰 불가 - 로 인한 정치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일제는 그것은 무시한채 감정적인 문제만 부각시킴으로써 당시 권력층의 무능함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명성황후와 민씨척족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다기 보다는 명성황후의 경우 고종의 정책 파트너로서, 민씨척족은 그들 정책의 실무자로서 기능하였다는 것이다. 명성황후가 대외관계에 있어 성공적인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정치를 그녀가 이끌어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의 승인하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왕인 고종 역시도 조선의 근대화에 힘썼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실무에 있어서는 민씨척족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세력을 무시 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를 고종이나 명성황후 개인이 좌우했다는 것은 어패가 있으며 왕과 왕비 그리고 척족세력이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정치를 담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치세하는 과정에서 민생안정 실패라던가 인사등용의 편협성등을 보이는 점들은 문제시 될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그것은 민중운동에 부분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의 과장이나 폄하는 연구가 객관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겠지만 명성황후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그 시대의 독특하고 혼란한 상황과 이후 식민사관의 왜곡을 확실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국편위, 『한국사론』, 국편위, 1995
최문형外, 『명성황후 시해사건』, 민음사, 1992
이민원, 『한국의 황제』, 대원사, 2001
이배용, 『국사관논총』66집「개화기 명성황후 민비의 정치적 역할」, 국사관, 1995
나홍주, 『민비암살』, 미래문화사, 1990
이문열, 『여우사냥』, 살림, 1995
이수광, 『나는 조선의 국모다』, 세명,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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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29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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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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