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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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범 김구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김구는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 치료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 江)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단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군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韓國光復軍9개行動準繩)」을 체결하고, 이어 12월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國內挺進作戰)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김구는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같은 해 11월 23일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소공위(共委)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 염원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하셨다. 김구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김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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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29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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