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속요의 형성 및 전승 과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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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속요의 형성 과정
2-1 삼국 음악의 영향
2-2 속요의 형성 배경과 역사적 환경
2-3 민요의 속요화에 따른 唐樂의 역할

3. 속요의 전개 과정

4. 조선시대의 고려속요 수용 양상

5. 결론

본문내용

그가 습악제조의 책임을 이와 같이 완수하였음을 칭찬한 것이다.
최미정, 「고려속요의 전승 연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2. 재인용.
만약 그것이 태조 2년 정도전이 지어 올린 <靖東方曲>과 <納氏歌>를 악장에 올릴 때 고려속요의 선율을 차용하여 만든 일 등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예악에 대한 조선왕조의 표면적인 기준의 변화나 의도의 표방과는 달리 조선 왕조가 고려속요에 대해 가졌던 태도는 이를 활용하여 당시의 용도에 맞추어 쓰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의 두 곡은 전래의 곡인 <서경별곡>과 <청산별곡>을 개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장사훈, 「<청산별곡>과 <납씨가>와의 관계」/「<서경별곡>과 <정동방곡>·<永觀>과의 비교」, 『국악논고』, 서울대출판부, 1966.
개국 후 10년이 지난 태종 2년(1402)에 당시의 곡들에 대한 실제적인 검토가 있었음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신 등이 삼가 고전을 상고하건대 '音을 살펴서 樂을 알고 樂을 살펴서 政事를 안다'하고 또 말하기를 '樂을 합하여 神祈를 이르게 하며 나라를 和하게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正聲은 사람을 감동시키되 기운이 應함을 순하게 하고 姦聲은 사람을 감동시키되 기운이 응함을 거슬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周官 大司樂이 淫聲·兇聲·過聲·曼聲을 금하였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前朝에서 삼국 말년의 악을 이어받아 그대로 썼고, 또 宋朝의 악을 따라 교방의 악을 사용토록 청하였으니, 그 말년에 이르러 또는 음란한 소리가 많았사온데 조회와 연향에 일체 그대로 썼으니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國初를 당하여 그대로 인습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신 등이 삼가 兩部의 악에서 그 성음이 약간 바른 것을 취하고 風雅의 시를 참고하여 조회와 연향의 악을 정하고, 신민이 통용하는 악에 이르기까지도 미쳤습니다. 아래에 갖추어 열거하였사오니, 성상께서 밝히 보시고 시행하시어 聲音을 바루고 和氣를 부르소서."
이상의 인용문을 참고하면 傳來樂이 음란한 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그 중 곡조가 바른 것은 살리고 거기에 風雅의 시를 가사로 맞춰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태종 때까지는 부분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금지조처는 명기된 것이 없다.
) 태종 9년에는 鄕唐樂이 난삽하여 예악에 적합하지 못하다며 唐樂으로 雅樂을 만들어 쓰자는 견해가 있어 享樂 자체가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그럴 만한 인재가 없어 현실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태종실록」권17.
그러나 세종 조에 들어서면서 고려속요의 가사에 대한 각종 불만이 나오면서 개작하거나 사용을 금지하라는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세종은 변계량 등에게 향악의 가사가 卑俚하니 연향악에 쓰기 위하여 獻壽의 뜻과 警戒의 뜻을 넣어 각각 3수씩 지어바치라고 하여
) 「세종실록」권 7.
, 이에 변계량이 <慈殿之曲>을 지었다. 이 사건은 전래악에 대한 세종의 불만을 창작 악장으로 대체하고자 한 것으로, 여기에서 세종이 내용을 규정한 것은 이후의 아송 창작의 지침을 頌祝에 警戒의 뜻이 부가된 성격의 것으로 지향하게 한 단초가 될 수 있다.
그 후 성종 조에 들어서는 歌詞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비판의 관심이 내용에 있으므로 남녀간의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서경별곡>은 男女相悅之詞로 주목받아 別製歌詞를 갖게 되며, <만전춘>은 鄙俚之詞로 지목되고
) 「성종실록」 권 219.
, <쌍화점>, <이상곡> 등에 있는 淫褻之詞는 고쳐 바로잡으라는 명령이 있어 이후 쓰지 않게 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 「성종실록」, 권 240.
이처럼 제도와 문물이 정비된 성종 대에는 正風을 지킨다는 관점에서 男女相悅이 과녁이 되었으며, 향악 폄시 태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연산군의 廢政을 정리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중종 대에는 연산에 의해 과도하게 비대해진 女樂에 대한 시비와 함께 淫詞가 검열에 지적된다.
) 「중종실록」권 29.
그리고 <동동>은 작품에 드러난 巫的 성격이 閨怨의 내용과 함께 지탄의 대상이 되어 그 결과 <동동>은 <新都歌>로, <정읍>은 <五冠山>으로 곡조만 남고 그 가사가 대치되었다.
) 「중종실록」권 32.
그리고 원래부터 충신연주지사로 쓰였던 <정과정>조차 "곡의 悽婉함이 지나치다"
) 이익, 『성호사설』, 권 13, 「人事門」<國朝樂章>條.
고 하여 경계되는 것을 보면 충신연주지사의 기능으로 궁중에 남아있던 고려속요에 대한 기대가 점차 변화해 갔으며 조선 중기 이후 도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결론
지금까지 고려의 대표적 시가 문학인 속요의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속요의 모태인 민요는 삼국의 민요가 고려시대에 자연스럽게 전승되고, 한편으로 고려시대에 새로운 노랫가락이 만들어져 閭巷에서 가창되다가 그 중의 일부가 궁중으로 유입되어 개편 과정을 거친 끝에 이른바 속악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요가 궁중 속악으로 변이되기까지에는 여러 동인이 있지만 당악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음도 살펴보았다.
속요의 형성시기는 문헌상으로 고려 광종 때 이미 속요가 궁궐 안에서 즐겨 가창된 것으로 보아 고려말 궁궐이나 사회의 기강이 문란해진 시기에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고려시대 초기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리라 생각한다.
민요의 속요화 과정에 기여한 인물이나 계층은 大樂署나 管絃房의 관리들, 중앙이나 지방에서 궁중으로 들어간 女妓나 巫女, 왕의 측근 신하와 행신들, 높은 관직에 있던 사대부들이 민요를 채집하여 군왕에게 올린 사례들이 문헌 자료에 의해 밝혀진 점 등으로 보아 그들의 공헌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속요의 조선시대로의 수용은 세종 조 이전까지는 고려의 것을 계승하여 당시의 용도에 맞추어 쓰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세종, 문종 조에 들어서는 고려속요의 歌詞에 대한 각종 불만이 나오면서 개작하거나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지고, 성종, 문종 조에는 충신연주지사로 쓰였던 <정과정>조차 경계되면서 조선 중기 이후 도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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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22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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