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전리 서석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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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천전리 서석 암각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들어가기에 앞서 ★

★ 천전리 서석 암각화의 입지와 주변 환경 ★

★ 천전리 서석 암각화의 구성 ★

★ 평면그림 ★

★굵은 선 그림 ★

★ 가는 선그림 ★

★ 천전리 서석 ★

★ 끝으로... ★

★ 참고 문헌 ★

★ 바위 그림의 뜻풀이 ★

본문내용

있는 행렬로 보인다.
3. 명문에 윗몸이 깎여 나간 사람과 말그림
이 사람과 말그림은 명문을 새기기 위하여 깎여 나간 그림이다. 이 사람은 다라만 보이고 있는데 윗몸은 그 위의 명문을 샛길때 깎아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말그림은 굵은 선으로 윤곽선을 그렸다. 머리가 길고 입이 삼각형으로 들어갔으며 앞다리 하나를 쳐들고 꼬리는 내려뜨렸는데 날쌘 준마가 뛰어가는 동작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다리 하나와 뒷다리 그리고 배의 윤곽선은 명문을 샛길 때 깎아 버린 것이 확실하다.
4. 용그림과 장대 위의 새
용은 여기서 세 마리가 확실하게 보이고 있는데 제각기 독특한 모습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 보이는 새모습은 다섯 마리 정도가 구분되는데 장대 위에 앉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언뜻 보기에도 솟대를 연상케 하는데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5. 서 있는 사람
이 사람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눈.코.입 등이 다 표현되고 있으며 두 팔은 앞으로 모아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있는데 손가락들이 표현되고 있다. 웃옷은 여기에 바로 바지를 입고 있다. 바지 아래쪽에는 발을 옆으로 벌린 것까지 묘사하고 있다. 옆으로 약간 삐딱하게 한 얼굴이라든가 가지런히 놓은 두 손 또는 바지 등 모든 표현이 소년의 모습으로 보인다. 수련하러 온 화랑이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은지도 모르겠다.
@ 가는 선그림의 뭉뚱그린 뜻풀이
이 그림들 모두는 신라인의 생활모습과 신앙의식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데, 이 곳이 당시 상징적인 장소였음을 그림을 깎아내 가며 새긴 명문과 그 주변의 화랑 관계 글씨들이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여기의 행렬도라든가 승천되는 용그림 등 모든 그림들은 이러한 명문과 관련한 사회변천과 기원내용 등을 반영하고 있다.
★ 천전리 서석 ★
바위면의 중하부에는 300여자의 명문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명문은 두 번에 걸쳐 새긴 것으로 책자 모양의 원명과 그 완편의 추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명의 주인공은 입종갈문왕이며 추명의 주인공은 진흥왕으로 비정된다. 즉 당시 갈문왕과 왕권과의 관계를 알려 주고 있는데 명문에 보이는 을사년(법흥왕 12, 525)에 입종갈문왕이 결혼하여 이 곳에 행차하여 그 기념으로 이 글을 새겼고, 다시 그의 아들 진흥왕이 기미년(법흥왕 26,539 또는 진흥왕 즉위년)에 다시 이 곳을 찾은 것으로 추정된다. 입종갈문왕은 신라왕실의 가계분화가 촉진되던 시기에 새로이 분화되어 나온 한 가계의 시조였다고 생각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곳은 입종갈문왕계 세력의 상징적인 장소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명문에는 화랑들의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어 화랑들이 이곳을 도량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 천전리 서석- 원명 ★
[ 을사년(525)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이 없었으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서석곡으로 이름을 삼고 글자를 지어 새겼다.
같이 놀러온 이는 사랑하는 누이와 아름다운 덕을 가진 어사추안랑으로 모두 셋이다.
먹을 것을 많이 잡아 죽여 대어주는 사람은 이리부지 대나미와 실득시지 대사제지이며, 음식을 만든이는 영지지 일길간지의 처인 거지시해 부인과 진육지 사간지의 처 아혜모흥 부인이고, 글을 짓고 새긴이는 모모이지 대사제지이다. ]
위의 내용이 원명의 내용입니다. 사탁부의 갈문왕은 사부지 갈문왕으로 법흥왕의 아우이자 진흥왕의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여자의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하는데 신라시대 여성의 지위와 결부시킬 수 있겠습니다.
★ 천전리 서석- 추명 ★
[ 지난 을사년(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탁부의 갈문왕과 누이와 어사추안랑 셋이 함께 놀러 온 후 X년이 되었다.
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 : 팔사년과거매왕고매왕과인 (해석 미상)
정사년에 왕은 과거의 왕비 지몰시혜비를 스스로 생각했다.
기미년 7월 3일 그 왕이 매와 더불어 서석을 보러 더듬더듬 (천천히) 구경하면서 계곡으로 왔다. 이때 이들과 함께 셋이 왔는데, 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 시부지 왕자랑인 심X부지가 왔다.
이때 X작공신은 탁부의 지례부지와 X박육지 거벌간지이며, 의식을 맡고 있는 신하는 정을이지나마이다. 음식을 만든이는 진육지 파진간지의 아내인 아혜모호 부인과 아부지 거벌간지의 아내인 일리등차 부인과 거례차 X간지의 아내인 사효공 부인으로 나누어 함께 만들었다. ]
★ 천전리 서석- 그 외의 글자 ★
원명과 추명을 제외하고 각석에는 낙서와 같이 곳곳에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것을 잘 살펴보면 신라시대의 화랑 이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화랑들의 국토 순례장으로 볼 수 있다.
화랑들은 통상 3년 동안 서약, 수련, 의무이행 기간으로 정하여 국토 순례, 성산관참(聖山觀參), 영악수험(靈岳修驗) 등을 통하여 도의를 연마하고 ,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산수를 유오(遊娛) 하였다. 이러한 수련기간에는 산수가 좋은 이곳 천전리에도 찾아온 4선(仙)들이 그 이름을 새겨놓고 있다.
好世(호세) : 진평왕때의 화랑
水品(수품) : 선덕여왕때의 화랑
戊年六月二日 永郞成業(무년육월이일 영랑성업) : 영랑 : 통일신라 직후의 화랑
문정랑, 주매랑 등의 이름도 보인다.
★ 끝으로... ★
참고 자료마다 천전리 서석 유적의 보존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고 나옵니다. 발견 당시에는 뚜렷했던 암각의 특정 부분이 현재는 일정한 거리에서는 육안으로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십년 뒤에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진전된 연구 보고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겠습니다.
★ 참고 문헌 ★
살아있는 신화 바위그림 - 정동찬 지음 -혜안
한국의 암각화 - 한국 역사 민속 협회- 한길사
그외 자료들이 참고 되었습니다.
★ http://www.cheonjeonri.org/chun4.html ★
이 주소는 천전리 서석의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천전리 서석이 궁금하셔서 이 레포트를 보신다면 이 주소로 가보 셨으면 합니다. 천전리 바위의 그림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컴퓨터의 기종 에 따라 그림을 누르면 바위 재질의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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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12.23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9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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