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의 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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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기 전...

Ⅰ. 百濟(백제)의 起源(기원)과 國家形成(국가형성)-------- 1
1. 百濟의 起源 1
2. 百濟의 國家形成 2

Ⅱ. 百濟史(백제사)의 시기구분 ---------------- 5
1. 수도천도에 따른 시기구분 5
2. 지배세력(왕도)에 따른 시기구분 6

Ⅲ. 百濟의 對外關係 ---------------- 7
1. 高句麗와의 대립 7
2. 中國왕조와의 관계 8
3. 요서경략설 9
4. 倭와의 관계 11

Ⅳ. 百濟의 정치·경제와 사회 ---------------- 11
1. 중앙통치조직 11
2. 지방·군사제도 13
3. 사회구조 14
4. 百濟의 經濟 15
5. 百濟의 文化 16

맺음말...

본문내용

재는 곧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구당서》에 의하면 백제에서 경(經)자(子)사(史) 등의 서적이 널리 읽혔다 한다. 개로왕이 고구려의 위협을 호소하면서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가 《위서(魏書)》에 실려잇는데 자못 명문이었으며, 또한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은 노장사상을 세련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어 당시 한학의 높은 수준을 알려준다. 洪思俊 <백제 砂宅智積碑에 對하여>《歷史學報》6. 1954.
백제의 국사편찬은 전술한 바와 같이 고흥이 서기(書記)를 편찬하였다.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할 무렵에 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것은, 안으로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 밖으로 국가의 위신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국사의 편찬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유교(儒敎)를 중요시하였다.
3) 예술의 발달
백제의 예술은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백제의 건축물로는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이 가장 유명하다. 전자는 목조탑의 양식을 모방한 거대한 석탑이고, 후자 역시 목조탑의 형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면서 특히 균형이 잘 잡히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걸작품이다. 불상으로는 서산의 마애삼존석불(磨崖三尊石佛)과 공주 출토의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이 있는데, 이들은 엷은 미소를 띠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1993년에는 능산리의 건물터에서 금동용봉봉래산(金銅龍鳳蓬萊山) 향로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어 당시 백제공예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고분도 많이 남아 있는데, 서울 강동구 석촌동의 고분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양식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웅진시대에도 고구려 계통의 굴실 돌방무덤이 만들어졌지만 한편에서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공주고분이 아직도 소박하고 고졸스러운 데 비하여 사비시대에는 부여 능산리 돌방고분에서 보여지듯이 규모는 작지만 축조기술이 세련되어 있었다. 백제고분에도 벽화가 그려졌는데, 지금 남아 있는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고분의 4신도는 백제미술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기록인 지석(誌石)과 함께 금관식(金冠飾)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어 당시 공예술의 발달을 엿보게 한다.
4) 문화의 일본 전수
삼국의 발달된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그들의 고대문화 설입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삼국은 대륙으로부터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소화흡수하고 개성있는 스스로의 문화를 수립한 후 이것을 다시 일본에 전수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삼국문화의 일본전수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백제였다. 그것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일본과 지리적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친선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 때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어 박사 왕인(王仁)이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이에 일본의 한학열이 점점 와성해져 근구수왕대에는 일본에서 백제인 학자를 초빙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 백제에서는 유학 뿐 아니라 도자기직조도화 등의 기술까지도 전수하였다. 백제의 남천 후에는 문화의 전수가 보다 활발하여져서 무령왕은 5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냈고, 이어 성왕도 5경박사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의박사(醫博士) 등을 보내 일본인들에게 유학 및 여러 학술과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특히 성왕은 노리사치계(怒唎斯致)를 보내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고, 무왕 때에는 관륵을 보내어 역(易)천문지리둔갑방술의 책을 전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는 유교불교를 비롯하여 의약천문지리음양오행 및 공예미술 등 여러 가지 학문과 기술을 일본에 전하여 飛鳥(아스카)文化 형성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백제의 국가형성과 발전과정에 대한 여러 논의와 시기구분에 대한 두 가지 입장, 그리고 대외관계를 포함한 백제 사회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우리가 백제사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백제사에 대해 여러 이설이 있어서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 곤란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설에 대한 정확한 근거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백제사에 대한 이설들을 부분적으로 통합하고 정설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더 많은 사료와 유물, 유적을 통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백제는 초기 기록부터 신불신론에 휩싸이면서 많은 이설들이 나오고 있다. 이는 사료들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어떤 사료를 더 신빙성 있게 보는 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백제사의 전반적인 흐름은 공통적인 면이 많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에서는 이견이 많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한 사료에 치우치기보다는 그것들을 상호 보완하여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즉, 일반적인 정치상황의 전개는 《삼국지》 「동이전」 을 중심으로 단계화하여 정리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으로 보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및 참고홈페이지 』----------
《삼국사기》
노중국 《한국고대사론》『백제사의 재인식』1987
노중국 『백제정치사 연구』1988, 일조각
최몽룡 《백제사의 이해》 1991, 학연문화사
유원재, 《한국사 6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국사편찬위원회, 1995
충청대학 한국사연구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서경문화사 1998
박현숙 《잊혀진 우리의 역사 - 백제이야기》 대한교과서 1999
이기백 《한국사신론》1999
이기동 《백제사 연구》 일조각, 1999
이기백, 이기동 《韓國史講座 - 古代篇》, 일조각, 2001
강종원 《4세기 백제가 연구》, 서경, 2002,
최원용, 논문『백제의 대외관계에 대한 연구』
http://mahan.wonkwang.ac.kr/nonmun/03/9630501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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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3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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