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의 전개와 그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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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사의 전개와 그 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발해사의 전개 과정과 구조
1) 발해의 성립 과정
2) 발해의 전개과정
3)발해 멸망 후 동향
4)발해의 사회 구성 체제
5)발해인의 고구려 계승 의식
6)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의 인식

2.남북국 시대론과 신라 · 발해의 관계
1)남북국 시대론의 내력
2)신라와 발해와의 관계

본문내용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한편 한에서는 이우 성이 적극적으로 남북국시대론을 제기했고, 이를 계기로 최근에ㅣ 들어 일부 개설서들에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왕조중심의 시대구분이 지니 는 결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는데 한국사에서 삼국시대란 용어 나 중국사에서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분위기에서 굳이 기피할 이유 는 없다고 필자는 말하고 있다.
2)신라와 발해와의 관계
한국사통론 교제에서는 대립 또는 세력 경쟁을 벌였던 시기와 상호 교류 시기 두 시기로 나누고 있지만 한국사에서는 보다 자세히 다섯 단계로 나누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싣고자 한국사 내용을 위주로 썼다.
①발해 건국기의 남북 교섭(698년~713년 사이의 20여 년간의 남북 교섭기)
- 대조영 2년(700) : 발해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신라 최치원이 당 소 종에게 보낸 글에서 발해에 관해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와서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 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를 통해 알 수 있다)
②발해 왕권확립기의 남북대립(2대~3대 집권중기. 713~785년)
- 무왕(732.무왕 14년) : 대조영 집권 말기부터 발해와 신라는 대립관계로 전환되기 시 작했는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신라 성덕왕 12년(713)에 발해와의 접경지역인 開城 에 城을 쌓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와 신라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계기는 무왕 14년(732)에 있었던 당나라 공격에 신라가 개입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발해는 대문예 송환 문제를 거절당하자 당의 등주 지역을 공격하게 된다. 이에 당은 대문예로 하여금 발해를 공 격하게 되고 당에 와 있던 사신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 청을 한다. 이에 신라는 당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발해의 남쪽 국경지역으로 파견하였으나 폭설로 다수의 동사자만을 내고 퇴각하게 된다.
- 또 다른 대립 시기는 일본의 신라 공격계획에 발해가 끼어든 일이었다. 일본은 742 년과 753년 두 차례에 걸쳐서 신라에 파견하였던 일본 사신이 신라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갔던 일을 수치로 여겨 신라공격계획(758~764)을 세웠다. 이에 일본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의 측면지원을 요청하였는데 발해도 이에 동조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해의 중도 포기와 안사의 난(755~763) 당나라 현종 말에 변방의 절도사인 안녹산, 사사명이 일으킨 난으로 이 난을 계기로 당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어 결국 당나라를 멸망하게 한 사건이다.
에 따른 국 제 정세의 변동(삼국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대립도 완화되어 감에 따라 동아시아의 평화적 분위), 그리고 일본의 정세변화로 무산되었다.
③신라 귀족 항쟁기의 남북교섭(785~818)
- 신라 37대 선덕왕(김낭상)과 38대 원성왕(김경신)은 혜공왕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귀족 항쟁기의 신라하대를 연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당으로부터 받아왔던 책봉을 통 한 외교적 승인절차가 없는 정통성이 결여된 상황이었고 왕위에 오른 후 잦은 천재지 변으로 정치적 도덕성은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 하기 위해 내부의 불만과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에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 하대 세력 간의 다툼이 원성왕때 나타났는데 이러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외교를 통 해 관심을 외부로 전환시키려는 일환의 노력(790년에 신라가 발해에 신라도를 통하여 사신을 파견)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한계가 드러나 발해에 대한 기대 가 신라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④발해의 영토 확장과 신라 당 밀착기의 남북대립
- 10대 선왕 대인수의 즉위와 함께 발해는 고구려 영토 수복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과 신라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게 된다.
-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교섭에서 대립으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은 신라와 당 의 군사적 협력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즉 당 내부에서 일어나 이사도의 반란사건 806년 당 헌종이 즉위하여 서천, 하수 등의 서쪽 번진을 토벌하기 위하여, 이사도를 검교공부상서를 경하여, 부대사로 삼았으나, 회서를 평정하고 난후 반란을 일으켜, 819년 당 헌종은 이사도의 관직을 박탈하고, 토벌군을 파견하면서 신라에 원군을 요청, 신라는 순천군 장군 김웅원이 갑병 3만으로 돕게 하였고, 이에 이사도가 대항하여 싸우다 패해 사망 하였다
을 계 기로 매우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게 된다.
◇ 신라가 발해와 대립 관계였던 사례
1. 일본의 승려 원인이 쓴 「入唐求法巡禮行記」中 - 음식을 차려놓고 3일 밤낮으로 논 이유가 신라가 발해와 싸워서 승리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839년 이전에 신라와 발해와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있을 거라는 추측 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 신빙성은 의문으로 남는다.
2. 신라와 발해 사신의 자리다툼사건(席次爭長事件)
: 대위해 4년(897)에 당에 사신으로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당시 발해의 국세 가 신라보다 강성함을 들어 발해가 신라보다 우선하여야 한다고 당 소종에게 요 구하였다. 그러자 소종은 이것을 거절하고 신라 우선의 옛 관습대로 하였고, 이 러한 소식에 접한 최치원이 당 소종에게 감사의 글을 보냈던 것이다.
3. 빈공과 시험에서의 수석 다툼
869~873년 사이 발해 도소도와 신라 이동 사이에 당 빈공과에서 수석 다툼.
906년 신라 최언위와 오광찬 사이에도 빈공과 수석 다툼이 있었음.
⑤발해 멸망기에 남북교섭(905~926)
- 10세기 초 거란 세력의 팽창으로 멸망 위기에 처해 있던 발해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 하였고 이에 신라는 도움을 주기로 약속하였으나 결국 거란을 도운다. 이는 신라 내부의 혼란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발해에 대한 공동체의 식의 변화에도 찾을 수 있다.(남북국이 200여 년간 정치적 긴장과 대립을 유지하였던 결과로 남북국을 형성하였던 7세기 말엽보다 공동체의식이 훨씬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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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13
  • 저작시기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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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44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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