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요서 경략설의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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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 요서 경략설의 검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의 개요

2. 관련기사 검토

3. 믿을 수 없다는 주장

4. 부정하기 어렵다는 주장

결론 - 해상왕국 백제, 올바른 복원이 필요

본문내용

대방인이 새로운 삶의 활로를 찾아 백제로 내려왔다. 이들이 백제에 와서, 중국과의 외교업무나 중국 문물 수입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백제는 이들을 매개로 과거 낙랑군, 대방군이 가지고 있던 대중국 무역의 주도권을 그대로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고, 활발한 해상활동을 펴는 가운데 요서지방까지 진출할 수 있는 능력과 기반을 갖추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하겠다.
한편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한 기록 자체를 불신하는 견해도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백제의 대륙진출을 맨 처음 알려주는 기록은 우리쪽의 것이 아니라 중국쪽의 것들이다. 만일 우리쪽 기록에만 나타나는 것이라면, 일본 학계의 '임나일본부설'처럼 사료 가치를 둘러싸고 더 많은 문제가 제기될 것이 분명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불신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료의 객관성을 논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 프리미엄이 붙을 수도 있다.
물론 실제 사건이 일어난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라면 당연히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송서』는 송나라가 멸망한 지 10년이 채 안된 488년에 심약(沈約)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시간 차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특히 그 백제전의 내용은 대부분 백제와 송 사이의 활발한 사신 왕래를 통해 얻어진 당시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송서』가 편찬될 때, 심약이 백제에 대해 터무니 없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최초의 관련 사료인 『송서』백제전의 기사가 전적으로 부인될 수 없는 한,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결론 - 해상왕국 백제, 올바른 복원이 필요
백제의 대륙진출을 긍정하는 입장이든 부정하는 입장이든 간에 백제가 해상왕국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백제는 일찍이 일본열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일본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전하는 교량역할을 하였으며, 야마토 정권 때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찍이 공인된 것으로 백제가 해상왕국적인 성격을 가진 나라임을 입증하는 대목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나라 이후로 중국의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해안 및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는 군사적인 간선로이자 문물교류의 간선로였다. 낙랑과 대방은 이러한 간선로를 활용하여 중국이 건설한 일종의 전진기지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혼란기에 들어가자, 이 해상지배권을 두고 주변나라들의 각축이 벌어졌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백제는 우선중국의 전진기지였던 대방군을 차지하고, 적극적으로 중국계 유이민을 포섭하였다. 이와 함께 이 해상루트가 백제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방 진출을 위한 후방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의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도 백제의 해상권 독점을 경계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백제로 불교가 전래된 것도 이 해상로를 통한 것으로 이 당시 백제는 이미 이 해상로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백제의 수도천도를 해상권과 깊이 연관지어 보는 시각이 있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 후 백제의 해상권 장악은 불안한 상태로 들어갔으며, 그 뒤 서서히 고구려에 의해 중국 진출력이 상실된 백제는 제2의 수도인 웅진성에서 역량을 회복한 뒤, 부분적으로나마 해상권을 재확보하기 위해 수도를 보다 남쪽에 있고 바다로 진출하기 쉬운 사비성으로 옮기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백제는 그 뒤 전성기의 영광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 채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후기의 해상루트를 통해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가 쉽게 들어옴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삼국이라는 차원에서만 삼국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한강 유역은 매우 중요하다. 대외관계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삼국이 서로의 세력을 확대하고 다른 국가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해상권은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백제가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시기는 백제가 고구려와 맞설 정도로 강력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긴 시기는 이러한 해상진출권이 결정적으로 위축된 때였다. 그리고 이러한 위축은 종족연합국가로서의 백제를 내적으로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요하였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 과정에서 『삼국사기』는 이러한 부분을 선택하지 않고 백제의 활동에 대해 축소 지향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일본 경영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이 가치평가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삼국이라는 시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지금에 와서는 사실 자체를 복구하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이처럼 우리 역사는 아직도 새롭게 복구되고 다시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이런 가치평가의 문제는 요서경략설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백제의 대륙진출에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당시의 역사를 짚어보아야 한다. 무턱대고 장기간에 걸친 점령을 주장한다거나 반대로 대세론상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부정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지나친 확대해석은 합리적인 이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임나일본부설'이 거론되면 적극적으로 부정하려고 애쓰면서도, 백제의 대륙진출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럴수록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찬란한 역사를 운운한다거나, 하는 복고적 국수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먼저 그 사실부터 확인해야 하고, 또 그 사실이 백제사의 발전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 참고 ■
장동익 외 공저,『한국사강론』, 영운출판사, 1997.
박현,「백제는 과연 중국에 식민지를 두었나」,『한국사산책』,백산서당,1996.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백제영토, 중국대륙에도 있었나」,『한국고대사산책』,역사비평사,
2002.
http://mahan.wonkwang.ac.kr/nonmun/03/96305019.htm(논문「백제요서경약설에 대한 일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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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09
  • 저작시기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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