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안락사 논쟁과 불교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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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 안락사 논쟁과 불교적 관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1). 문제제기 / 접근방법
2). 안락사 개념?

Ⅱ. 본 론
1). 안락사 어떻게 볼것인가?
2). 생명존엄성 원칙과 환자의 인권
3). 안락사의 유형화
4). 세계각국의 현황과 태도
5). 찬성입장(온건적 자유주의 입장)
6). 문제점
7). 부작용
8). 불교적 생명윤리학적 관점

Ⅲ. 결 론
1). 작성후기 / 안락사문제 대안제시
2). 참고문헌

본문내용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극도로 어려운 시기에 있는 환자와 가족들의 신체적, 심리적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와 가족들은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원하는 것이다. 죽음의 과정 중에도 희망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8) 불교적 생명윤리학적 관점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환자 자신이 적극적으로 인위적 죽음을 간절하게 원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안락사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불교 또한 생명이 앓는 고통을 덜어주고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인위적 죽음의 행위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 불교의 제1계인 불살생의 정신은 물론, 자연주의적인 연기론적 세계관이나 인연법칙에 따르는 불교의 생사관에 비추어 볼 때 안락사는 그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존재는 모두 연기론적 구조를 띠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인간의 생과 사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인연법칙으로서의 존재와 소멸이다. 불교의 생사관이 이처럼 연기론적 구조와 인연법칙으로써 해석되는 자연주의적인 것이라면, 그 인위적 파괴인 안락사는 결코 용인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어떻게 바라만 볼 것인가, 철저하게 추락하는 인간의 품위를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 하는 현실문제는 그래도 남는다.
연기설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의 멸진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교설을 십이지연기설 또는 줄여서 십이연기설이라고 부른다. 십이지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지분이 열둘이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말은 '연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는 뜻인데, 각 지분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고,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부른다. 이 십이연기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의 실존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 속에 헤매게 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오랜 각고의 구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가모니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 주고 있을까.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을 석가모니께서 이룬 깨달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게 된다."
Ⅲ. 결론
1) 작성후기 / 안락사문제 대안제시
만약 우리의 법이 바뀌어서 누구라도 안락사를 수행할 수 있다면, 정당하게 죽여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명백한 구분선이 없다는 것이 실제로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제안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안락사를 허용했을 때 남용문제, 의사의 오진가능성, 종교 윤리적 문제 등과 같은 부작용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3자의 입장에서 법률적, 경제적, 윤리적 측면으로 안락사를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입장에서 안락사를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 레포트를 준비하면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인 것 같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혜택만큼이나 무서운 부작용이 뒤따르는 위험부담이 큰 안락사를 첫째로 허용하는 대신 우리 조가 대안으로 내세운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의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행위로서, 남은 여생동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인 돌봄을 통해 삶의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하며, 사별 후 가족이 갖는 고통과 슬픔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총체적인 돌봄(holistic care)을 뜻한다)나 다소 엉뚱할 수 있지만 신선한 대안인 냉동인간, 국가의 요양기관확보와 임종휴가를 고려해봄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2) 참고문헌
◈ 피터싱어, 헥가커스 공저 2005 생명윤리학
◈ 데이먼 키온, 2000 불교 생명윤리학 불교시 대사
◈ 서울경제신문발췌 2001년
◈ 마이클 파머 안락사 현대문화센터 1995
◈ 오점순(도경스님) 2005년 안락사에 대한 불교적 접근 논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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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6.06.18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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