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을 다녀와서(담양 가사문화권과 송강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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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담양을 다녀와서(담양 가사문화권과 송강 정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담양을 다녀와서....
(담양 가사문화권과 송강 정철)

<목 차>
Ⅰ. 가사문화권
1. 가사문화권이란
2. 가사란

Ⅱ. 송강 정철과 식영정
1. 송강 정철
2. 식영정

Ⅲ. 답사 후기

Ⅳ. 그 밖에 가 볼 곳
1. 소쇄원
2. 환벽당

본문내용

상으로 보는 문화유산 이란 과목으로 인해 가사문화권의 답사로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견해와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Ⅳ. 그 밖의 볼만한 곳
1. 소쇄원
소쇄원은 조광조의 문인(門人)이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평생을 처사(處士)로 살면서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 면에서 볼 때에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 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 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 (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 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다. 처사공 양산보는 이렇게 아름다운 원림을 완성해 놓고는 자손들에게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 과 "돌 하나 계곡 한 구석 내 손길, 내 발자국이 닿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하나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처사공의 후손들은 당신의 유지를 받들어 오늘날까지 헌신적으로 이 별서정원을 지키고 있다. 자미탄의 이 누정과 원림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화유산이 그렇듯 1980년대까지는 아는 사람만이 알아주는 유적이었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서면 마침내 대중에게도 사랑 받아 관광과 답사의 명소로 됐다.
2. 환벽당
환벽당은 홍문관 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성주를 역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인데 송강 정철, 사하당 김성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다. 담양가사문화권역에 있는 환벽당(環碧堂)은 광주호 상류 충효동쪽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부근에 위치한 용소는 환벽당 및 창계천의 깊은 물웅덩이를 말하며 이곳은 송강 정철에 대한 전설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환벽당에서 사촌이 낮잠을 자는 데 꿈에 환벽당 앞 용소 에서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이를 이상이 여겨 하인을 시켜 살펴 보라 하였는데 어린 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동자가 바로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피신하는 길에 잠시 쉬고 있던 송강 정철이다. 사촌이 송강을 불러 문답하는 중에 그 영특함에 놀라 자기 슬하에 두고 학문을 닦게하여 송강 나이 17세에 그를 외손녀 사위로 삼고 정철의 뒷바라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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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6.06.20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5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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