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건국과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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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건국과 발전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문제제기 및 개요

Ⅱ. 발해의 시조 '고왕 대조영(大祚榮)’

Ⅲ. 발해의 건국과정

Ⅳ. 대조영의 출신

Ⅴ. 발해의 종족 구성과 지배 세력

Ⅵ. 발해의 유적지와 문화재로 본 고구려 계승
1) 정혜 공주 묘
2) 발해의 온돌
3) 발해의 도기와 자기
4) 발해의 산성
5) 최근 발견된 '연해주 체르니아티노 고분군’과 ‘고르바트카 발해성터’

Ⅶ. 발해의 대외관계
1) 발해와 당(唐)의 관계
2) 발해와 일본(日本)의 관계
3) 발해와 신라(新羅)의 관계
2) 발해와 고려(高麗)의 관계

Ⅷ. 발해의 발전

Ⅸ. 발해의 멸망

Ⅹ. 발해사에 대한 인식

Ⅹ. 결론

본문내용

요나라의 태조본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요의 태조는 918년 요양에 행차한 후 본격적으로 요동 지역을 요나라의 통치 지역으로 공고화 하기 위하여 한인과 발해인, 단주, 순주의 백성까지 이주시켰다. 요의 침략은 발해 영토가 일정 부분 상실 되었다는 의미이며, 멸망의 과정을 거치는 중앙 정부의 약화로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발해는 곧 요주를 공격하게 된다 그 이유는 중앙 정부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 였다. 이후 요나라 태조는 924년 6월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을 정벌하러 떠나게 된다. 요나라의 주력군이 서쪽으로 이동하자 발해는 외부적인 위험에서 잠시 벗어나게 되었다. 외부의 긴장감이 완화 되면서, 발해 내부에서는 다시 정치 투쟁이 일어나게 되고. 925년 9월, 고려로 망명한 발해인들은 정치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인 것이다. 요나라의 태조가 이끈 군대는 신속하게 서쪽 지역을 정벌하고 돌아왔으며, 925년의 국제 정세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발해 마지막왕인 인선왕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외교적으로 오월과 신라와 결속을 맺어 요의 공격에 충분히 대항할 여유를 가졌다. 925년 12월, 요나라의 태조는 요동 지역에서 발해 서부를 공략한 것이 아니라, 북쪽 지역이던 부여부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부여부는 상경용천부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부여성만 돌파하면 수도를 기습하기에 아주 유리한 위치였다. 부여성이 함락된 후 길목에 있던 차단성과 방어성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요의 주력 부대가 기병이 중심이 되어 신속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요군은 발해의 거란도를 따라 공격에 들어갔다. 당시, 부여부는 3일간의 전투를 치루었지만, 요의 대군에 무너지고 발해 노상이 이끌던 3만 발해군도 적의 선봉 부대에 괴멸 되어버려 10여일 만에 상경용천부는 포위 되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주위의 발해군이 지원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미 수도를 지키던 3만 발해군은 출전하여 괴멸 되었고, 한편으로 16km나 되는 평지성을 방어한다는 것은 요의 대군 앞에서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더욱이 고구려나 발해 초기처럼 이원화된 방어 체제(산성과 평지성)가 아닌 점이, 상경용천부의 함락을 쉽게 만들었다. 결속을 맺었던 국가들이 발해에 군사적인 도움은 커녕 오히려 요군을 도와주는 사태가 일어났다. 발해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요나라에 멸망을 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이다. 비록 926년에 발해는 멸망하고, 국왕 이하 대부분의 신하는 요에 잡혀 갔지만 세자 대광현에 의해서 935년까지 항쟁은 계속 되었다. 이후에도 발해 후국들이 계속 발해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발해 후국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Ⅹ. 발해사에 대한 인식
발해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로 인식되지 못하였다. 동시대에 살았던 신라인들도 발해를 북쪽 나라(북국) 정도로만 생각하였고, 같은 민족으로 인식 하지 않았다. 두 나라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하였다. 발해가 강성해지자, 신라는 북쪽 경계 지역과 대동강 유역에 긴 성을 쌓아 발해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한때는 당나라의 사주를 받고 당과 함께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발해의 주요 교통로 중에는 신라로 가는 길이 있어 교류가 가능 하였지만, 신라에서 발해로 사신을 파견하는 일은 두 차례만 기록으로 전해질 뿐이다. 발해와 신라 사이에는 경쟁 의식이 강하여 당에 파견된 사신들 사이에 자리 다툼이 벌어지고, 과거에서 서열을 두고 다투는 등 좋지 않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는 발해 왕족인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는 등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까지는 인식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 였다. 안정복 : 조선 후기 실학자.「동서강목」의 저자.
안정복(1712-1791)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북국이란 나라가 발해임을 최초로 파악한 인물이다. 유득공(1749-?) 은 체계적으로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정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1784년에 지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남북국 시대를 설정하여,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를 동등하게 우리의 역사로 취급하였다. 지리 학자로 유명한 김정호(?-1864) 도 1864년에 쓴 「대동지지」에서 남북국시대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 시기에도 이어져, 신채호(1880-1936) 와 장도빈(1888-1963, 언론인, 국사학자) 등이 신라와 발해를 대등하게 다루었다. 근대 사학의 선구자인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오랫동안 발해는 우리 민족의 역사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일부 학자들이 발해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이것이 대중화 되지 못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강조하고, 통일 신라만을 정통 왕조로 인식하다 보니, 발해는 어정쩡한 형태로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와서야 발해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정당하게 자리 매김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남북국 시대가 보편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에는 국사 교과서에도 그 성과가 반영되어, 우리들은 발해를 신라와 함께 온전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최근에는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을 발판으로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Ⅹ. 결론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민족의 주권국가였다는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고, 고구려 옛 장수였던 대조영이 세운 나라였고, 그것은 엄연히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배우게 되었다. 발해는 지금도 많은 유적과 유물 등이 중국 만주 벌판과 러시아의 연해주 땅, 곳곳에 숨을 쉬고 있다. 아직 잠들어 있는 유적과 유물들은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끝으로 발해 역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각인하고 끊임없는 관심으로서 접근한다면 잠들어있는 발해의 천 여년 전의 역사를 깨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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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05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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