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의 독립운동과 좌우합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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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운형의 독립운동과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여운형의 독립운동
1.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2. 고려 공산당과 중국의 국공합작운동

Ⅲ. 건국준비운동과 좌우합작운동
1.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2.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

Ⅳ. 여운형의 암살과 그에 대한 평가
1. 여운형의 암살과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체
2. 여운형에 대한 평가

Ⅴ.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게 되었다. 나중에 좌우합작운동에서 미군정이 여운형을 지지하게 된 것도 여운형에 대한 오해가 풀린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운형이 좌파와 연계해 있다는 사실을 미군정은 그리 달갑게 보지 않았다. 미군정은 그로 하여금 공산당과 손을 끊도록 하려고 했으며, 여운형을 이용하여 좌익을 분열시키려 하는 등 여운형에 대한 태도가 반드시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여운형도 미군정을 현실적인 존재로 인정했고, 그를 통하여 좌우합작운동과 통일 임시 정부의 구성을 추진하였지만, 그 역시 미군정을 꼭 호의적인 상대로 보지는 않았다.
- 여운형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그의 정치관은 기독교 정신과 윌슨 식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것이다. 여운형은 항상 좌익과 협력했지만, 공산당에는 결코 가입하지 않았으며, 유물사관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평민들의 사람을 받았고, 뛰어난 웅변술 등 너그러운 매력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여운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분단된 한국의 상황과 마니교적인(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한) 정치계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여운형은 한국 민족 대다수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었고, 농민계급과 친숙한 사람이었지만, 조금은 부르주아 신사적인 면모도 있었다. 또한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으며, CIA도 인정했듯이 권력 경쟁에서 이승만에게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비공산계 남한 지도자였다. 그는 남북한에서 존경받는 몇 안 되는 정치가 중 한 사람이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김동노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2001년 P261~295 인용 및 정리
위와 같은 커밍스의 지적대로, 여운형은 어느 정파나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색채를 지닌 진보적인 중도파였고,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지만, 이념의 대립이 극에 달하였던 광복 후의 한국 상황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여운형이 갖고 있던 인간적인 단점은 그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고, 다소 공명심이 강하면서 약간 허장성세하며, 조직적이지 못한 성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법한 애매한 처사를 보였었던 것도 분명 있었다. 여운형이 해방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테러를 당한 이유 중에는 기회주의자라는 평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결국 여운형은 암살을 당함으로써 어지러운 혼란기에서 중도파의 입지가 얼마나 취약하며 힘든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Ⅴ. 맺음말
여운형은 남북한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거의 드문 인물이다. 우익성향이 강한 남한에서도 그의 좌파적 이념 성향에 공감을 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뛰어난 인품과 청중을 사로잡는 화술, 사상 등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최근 들어 극단적인 반공 이념의 편견도 어느 정도 허물어진 덕택에 여운형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되고 있다. 여운형은 우선 그 이념을 떠나서 일제 강점기에 치열하게 투쟁하였던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여운형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즉,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고려공산당에서의 활동을 통한 인맥형성,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운동에 참가한 일은 광복 후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국내의 어느 정치지도자보다도 여운형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좌와 우를 넘다들며 외줄타기에 가까운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의 활동은 생명에 지장을 줄만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통일된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의 넓은 스펙트럼은 좌우합작운동에서도 입증되었다. 그런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들의 좌절은 광복 직후 통일을 추구하였던 이들이 어떻게 무너져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운형의 광복 후의 활동이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는 남북한이 분단되어 조용한 날이 별로 없는 오늘날의 현실을 비추어 보더라도 해방 후의 좌우합작운동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광복 후, 소련과 미국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남북한이 반드시 갈라질 운명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의 예를 보면 더욱 그렇다. 1938년 히틀러의 독일에 의하여 합병되었던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으로 분류되었고, 4개국의 분할 통치를 받았지만, 1955년에 단일한 중립국으로 독립하였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비추어보면 남북한의 상황은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 통일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는 현 시점에서 여운형에 대한 조명은 한 개인의 생애를 살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의 주요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도 동시에 있을 수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들에 대한 연구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통하여 앞으로 남북의 통일 혹은 평화공존에 대하여 재정립을 하는 밑거름이 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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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해방정국 정치지도자들의 사상과 행동 ; 한국 정치 이념의 모색 ; 제 1 회의 해방정국의 정치 지도자 - 해방 정국에서의 중도파의 좌절 , 여운형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치리더십 기획학술회의’, 한국정치학회, 2000년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 한울아카데미, 2001년
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운형』, 신준영 편집, 김영사, 2001년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 정부사 연구』, 도서출판 혜안, 2001년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김동노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2001년
김희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연구』, 지식산업사, 2004년
이기형,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004년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웹사이트(http://www.mongyang.org)
KBS 1TV 인물현대사 - [광복 60년 특집]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 제 1편 여운형 (2005년 1월 7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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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28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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