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이순신 장군]충무공 이순신 장군 분석 및 현대적 조명(충무공 이순신 장군 집안 가계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순신 장군 측근,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해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현대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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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무공][이순신 장군]충무공 이순신 장군 분석 및 현대적 조명(충무공 이순신 장군 집안 가계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순신 장군 측근,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해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현대적 조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집안 가계도
1. 덕수 이씨
2. 이변(李邊, 1391~1473)
3. 이거(李據 ? ~1502)
4. 이분(李芬, 1566~1619)
5. 이회(李會, 1567~1625)
6. 이완(李莞, 1579~1627)

Ⅲ.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측근
1. 중앙의 관리들
2. 부장들
3. 이순신을 도운 호남인들

Ⅳ.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
1. 한산도 대첩
2. 노량해전
3. 당포해전
4. 명량대첩

Ⅴ.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음해와 반박

Ⅵ.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현대적 조명

Ⅶ. 결론

본문내용

연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았던 조선의 할아버지들을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 다만 그런 면모를 후대인들이 너무 미화하다보니 원균 장군과의 불화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의 측면조차 오히려 선선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감이 있다.
난중일기의 한 대목에서 그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들어보자. \" (1597년) 10월 14일 맑음. 새벽 두 시쯤 꿈에 말을 타고 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으나 쓰러지지는 않고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어났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 통곡 \'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이윽고 나는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
셋째 아들 면은 이순신의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이해 9월 16일을 전후해 북 진중인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스물하나의 꽃같은 나이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쉬흔둘의 젊지 않은 나이에 전장을 누비는 이 노장군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니,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전형적인 무인인 이 불세출의 장군을 괴롭힌 것은 병마였다. 곽란(심한 통증과 구토를 동반하는 신경성 위장장애)은 전쟁기간 내내 고통으로 달려들었다. \" (1597년) 8월 21일 맑음. 새벽에 곽란을 일으켜 몸을 차게 하면 안되겠다 생각해 소주를 마셔 가라앉히려 했으나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거의 살기 힘들 지경이다. 구토하기를 십여차례 밤이 되어도 고통은 여전하다. 8월 23일 맑음. 병세가 지극히 위태롭다. 배는 불편하다. 실로 전쟁터만 아니었다면 하선하여 뭍에 묵고 싶다. \"
위대한 장군, 성실한 아버지, 착한 아들 이순신...
IMF에 순국 400주년을 빌미로 다시 생각해본 이순신 장군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IMF와는 비교도 안되는 그 참담한 전쟁통에도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혀 잃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본다. 나폴레옹도 칭기즈칸도 군사적 영웅이었건만 그런 희망은 주지 못한다. 전혀. 하여, 다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한다.
Ⅶ. 결론
이순신은 조선의 진정한 대장부요 불세출의 민족적 영웅이다. 또한 그는 교언영색(巧言令色) 하지 않는 강의목눌(剛毅木訥)의 지성적인 인격자였다. 그는 조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무골의 장수이기도 했다.
삶의 굵은 선을 걸어온 그는 이상적인 지성인으로서 창조적 소수의 지도적 중추계층의 선비 위품을 갖춘 문무겸비의 지휘관이었다. 우리 나라의 선비정신은 애국효행(愛國孝行), 사회의리(社會義理), 선공숭문(先公崇文), 청빈근검(淸貧勤儉), 거경숭례(居敬崇禮), 지조신의(志操信義)의 6가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순신은 이에 합당한 인품을 지녔던 인물이다.
사대주의와 분파주의 사상에 찌든 16세기의 전제군주 사회에서 그는 현실적(zein) 및 이상적(zollen) 인격자로서 진정한 조선의 자랑스러운 대장부였다.
특히 그의 무인으로서의 공직생활을 통해 발휘한 리더십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누구도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의 무결점의 표본이었다. 그는 지성을 원리로 하는 자유인이었으며, 양심을 원리로 하는 성실인 이었고, 봉사를 원리로 하는 사명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장부답고 리더로서의 자질을 갖춘 리더십의 귀감을 보인 자유인, 성실인 그리고 사명인 다운 인간상을 현대적 시각에서 접근해본다.
첫째, 그는 자유인이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말씀처럼, 그는 확고한 주인정신을 진리로 삼은 노예정신이나 손님정신이 아닌 주체의식과 개척정신의 선구자였다. 주인정신의 빈곤은 숙명주의, 도피주의, 사대주의, 방관주의, 예속주의 그리고 은둔주의의 온상인바 이를 과감히 배격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사회풍조가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선비들이 판을 치는 혼탁한 세상이었으니, 오늘날의 사이비 내지 반동적 지성을 지닌 식자와 권문세도의 굴절사회가 지닌 추한 모습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속에서도 파사현정(破邪顯正)하려는 소크라테스적 지성을 지향한 자유인의 자세로 공직생활을 견지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성실인 이었다. 말세의 징후가 농후한 도덕과 윤리의 암흑가인 오늘의 현실사회에서 인간답게 살려면 충성과 신의(信義)에 의한 성실을 바탕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현대사회는 믿음에 의한 계약사회이다. 계약사회에서 국민의 성실을 기본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면, 불신과 갈등 그리고 왜곡과 파행이 판치는 부조리 사회로 치닫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체득하고 있다.
오늘날 이순신 같은 성실한 대장부가 국가나 사회의 지도자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혼탁한 것이다. 일찍이 공자(孔子)가 「부귀 앞에 혹하지 않고, 빈천으로도 변심치 않으며, 권세에 굴하지 않는 자가 대장부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을 본받으라고 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한 지식인의 병폐는 냉소적 허무주의, 지조 없는 기회주의, 비겁한 도피주의, 무기력한 회의주의, 나약한 패배주의,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무사안일주의를 산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그는 사명인 이었다. 사명인이란 이순신처럼 냉철한 머리(cool head)에 따뜻한 마음(warm heart)을 가진 자라야 한다. 지식에는 국경이 없으나, 지성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처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봉사?헌신하면서 공익 우선의 책임감과 사명의식을 지닌 자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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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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