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코드의 논리적 분석 (논리적 오류의 논리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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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빈치코드의 논리적 분석 (논리적 오류의 논리증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성경진리의 왜곡

Ⅲ. 다빈치코드의 왜곡된 논리

Ⅳ. 다빈치코드 내용의 허구성 논리적 증명

Ⅴ. 결 론

본문내용

수 있는 좋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사회적 불안과 기독교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기독교와 신앙현상이 갖는 극도의 불신감을 표현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아주 공감하며 통쾌해한다'는 것이다. 마치 로마제국 황제 네로가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떠맡기고 화형을 시키며 핍박했던 것처럼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불행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데 결국 기독교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음모자들이 아니면 이중인격자요, 고집쟁이, 시대착오적인 자들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반면 전통적인 신앙관이나 교회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숨겨진 진리를 찾는 자, 진실한 자로 그려진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신앙과 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위선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특히 젊은이)들의 기본적 정서에 아주 부합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호기심과 반항심 많은 현대인(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권위를 파괴하고, 금기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기독교를 음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더욱이 『다빈치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입네 하며 인간보다 위에 앉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초월자가 아니라, 그저 우리 보통 인간들처럼 결혼해 자식 낳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신이기를 억지 주장한다. 그러면서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살아가는 좋은 지혜나 이따금씩 가르쳐 주면 더욱 좋을 그런 신으로 여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이런 부패하고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기독교는 없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소설을 접하면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소설이 확실한 증거들, 즉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고고학적 물증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선정적인 것들을 주워 모아서 만든 것이다. 사실에 대한 설명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가정은 독단적인 결론으로 치닫고 있다. 문맥에서 떠나서 역사적 근원의 언어들을 왜곡시키므로 브라운은 자신의 풍자스러운 모습을 만들고 있다. 과거에 있는 신빙성 있는 다양하고 객관적인 자료들을 무시하고 지극히 편협적인 자료들, 즉 야사들을 모아서 집대성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풀어 썼다.
이에 대해 예수님과 기독교는 진정한 역사적 객관적 자료들과 기록들 위에 굳건히 있다. 지금까지 교회는 객관적 증거와 합리적 사고를 요구할 때마다 변증하고 늘 변호했다. 왜냐하면 거짓증거들을 가지고 기독교를 음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관해 기독교는 늘 승리해 왔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 인이든 합리적인 모든 이들에게 이해와 신실함을 심어주었다. 합리적이었고 정당한 역사적 근거들 위에서 증명되었고 변증되고 있다. 어느 누구의 논박에도 신실한 물증과 확증을 제시 하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다빈치 코드 논쟁은 놀랍게도 성경과 교회역사를 얼마나 왜곡시켰는가에 관한 진위여부에 달려있지 않고, 대응방식에 따른 견해 차이에 집중되고 있는 형편이다.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이 같은 영화는 근본적으로 교회에 대한 모독이며 교회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대사회적으로 강경한 행동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소설이나 영화 한편으로 한국교회가 무너질 만큼 허약하지 않다며, 강경한 교회의 사회적 대응은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흥행에 도움을 주는 한편으로 문화를 모르는 기독교인이란 부정적 인식만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자칫 분열된 한국교회의 이미지로 세상에 비춰질 수 있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은 더더욱 못된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는 믿는 자를 갈라놓는 사탄의 전술에 말려드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교회는 항상 외부의 핍박과 공격에는 강한 모습을 보여 왔지만, 내부의 분열에는 허약하게 무너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지혜를 빌려 적절하게 대응방안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사도바울의 아덴 설교(행17장)는 이 점에서 매우 유익한 처방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노했다(행17:16). 바울은 분명 이 도시의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와 같은 성서를 왜곡시키는 문화에 열광하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고 문제점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라'(창1:28)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의로운 분노로만 일관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안 밖으로 변론하는데 힘을 썼다.
안으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밖으로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 나가 예수의 참 진리를 설파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듣는데 호기심이 많은 아덴 사람들의 문화적 행태를 깨닫고 그들이 관심을 끌만한 방법으로 주목받았다(행17:20)는 것을 뜻하는 일이다. 즉 사도바울은 예루살렘과 아덴 사이의 접점을 찾아내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 세상은 아덴사람들처럼 새로운 이야기에 열광하고 있다.
성경은 늘 새롭다. 다만 묵은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다 알기 때문에 성경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알자. 관심을 가질 만한 문화의 접촉점을 찾는데 실패한 이유가 크다.
따라서 다빈치 코드를 접촉점으로 삼아 진짜 새로운 예수 이야기를 들려줄 방안을 모색해 볼 일이다. 과거 우상으로 가득차 있었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지금 단 하나의 신상도 남아있지 않음을 기억하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속적 주제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즉 기독교적 전제위에 형성된 체계 안에서 세속적 논쟁들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정통하고 준비가 잘된 훈련된 사람들이다"
- 존 스토트
  • 가격1,5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7.02.15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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