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문화 교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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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중문화교류사

한국과중국의 지리적관계

한국과중국의 정치적관계

중국과 한국의 무역관계

한국과중국의 수출입품목

한국과 중국의 사회문학 교류

한국과 중국의 예술 교류

한국과 중국의 사상 교류

본문내용

등에게 재분배하자고 했으며 또, 노비신분의 세습을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영농을 바탕으로 농병일치의 군사조직도 주장했습니다.
또한 목민심서의 저자인 정약용은 한 마을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했으며, 서양 로크의 사회계약설과 비슷한 역성혁명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사법제도의 개혁에 관한 글을 저술 했으며 과학기술에서는 거중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중농주의 학파에 의해 농의학사전, 수리시설농업시설에 관한 책과 농업백과 사전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중상학파(북학파)인 홍대용은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 했고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양반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여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레와 선박을 이용 하기 위한 도량형의 통일과 화폐를 통용하자고 제의 하였습니다. 이러한 중상주의 학파들은
“재물은 데체로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라고 주장하며 절약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였습니다.
마지막 실사구시학파는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 하며 안정복, 정약용, 한치윤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각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물산, 풍속, 인심등을 서술하는 이중환의 택리지도 편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중화주의의 극복은 중국을 통해 서양에서 유입된 서구적 세계관과 과학에 의해 더욱 자극되었습니다.
당시 북경에 머물던 서양인 선교사들이 있었는데요. 천주교를 중국에 전래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수준급의 학자였기 때문에 서양의 발달된 천문 수학 지리 물리 등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시기에 조선인 使行(사행)원들은 이들이 거처하는 곳에 머물며 서양 선교사들과 접하며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입해 왔습니다.
최석정은 수학의 무한대, 무한소의 개념을 정립하고,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이 도입 하였습니다. 이러한 수학적 지식과 서양 지도의 영향을 받아 실측을 통해 보다 정밀한 지도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모눈종이를 이용한 정교한 지도를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로 집대성됩니다. 또한 신경준의 <산경표>에서는 산맥을 실측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최근의 위성조사에서 거의 정확한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의학분야에서 정약용은 <마과회통> 에서 종두(천연두)에 대한 치료법을 언급하고,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에서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을 분류하여 사상의학에 관한 내용을 엮었으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된 허준의 동의보감도 나왔습니다.
과학 분야에서는 이규경은 조선 유일의 화학기술서인 <오주서종>을 편찬 하였으며, 하지만 이러한 서양의 과학과 천문학의 발달로 인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 탈피의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더불어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엄청난 충격도 받습니다.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가치관과 대치되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도 일으킵니다. 초기의 조선정부 천주교를 종교로써가 아니라 서양문물의 하나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자 드디어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천주교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습니다. 1791년〔신해박해〕를시작으로〔신유박해-1801〔기해박해-1839〕〔병오박해-1846〕〔병인박해-1866〕등 초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많은 사회적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후로 벌어지는 1860년 서학에 반대하여 동학이라는 종교가 발생하는 계기도 됩니다.
그리하여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대치되어 실학자들 사이에도 “서양 것을 무조건 배격하자! “아니다 서양의 과학 기술만 받아들이자“. 또 다른 세력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 모든 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는 의견충돌로 후기 조선사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의 서구 열강의 출현과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한국은 중국이 중심으로 생각해 오던 세계관을 바꾸었으며 땅은 평평 한게 아니고 둥글다는 근대적인 가치관으로 차츰 개화됩니다.
참고자료 :
한중관계사 : 김한규-아르케
조선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한국역사연구회:-청년사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 김대길-가람기획
이야기 중국사 : 김희영-청아출판사
www.empas.com 백과사전
www.yahoo.co.kr 두산동아세계백과사전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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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02.15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4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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