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감독의 복수시리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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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찬욱감독의 복수시리즈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론
󰋮박찬욱에 대하여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

▲ 본론
󰋮복수는 나의것의 내용
󰋮올드보이의 내용
󰋮친절한 금자씨의 내용

▲ 결론
󰋮박찬욱의 복수시리즈 결론

본문내용

수의 방법이란 최민식을 자신의 쌍생아로 만드는 것이었다. 요컨대 '근친상간' 말이다. 이 과정에서 두사람은 서로에 대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다. 유지태는 알고 집착하고, 최민식은 모르고서도 집착한다. 집착의 이유는 물론 복수다.
유지태가 최민식의 입놀림을 단죄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입 때문에 누이가 상상임신을 하고 자살을 해버렸다. 근친상간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즉 관계 외부에 있는 최민식(유지태는 말한다. '넌 그냥 잊어버린거야. 남의 일이니까')을 유지태는 최민식으로 하여금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하면서 관계 내부로 끌어들여 단죄한다. 다시 말해 관계 외부에 있는 최민식은 유지태의 짝패다.
감금이라는 장치는 그래서 흥미롭다. 유지태에겐 세상이 감옥이었을 것이다. 누이를 사랑하는 남자에게 세상은 공포이자 감옥일 뿐이니까. 그래서 유지태는 매우 신화적인 캐릭터다. 공동체에 동일시될 수 없는(교환되지 않는) 그에게 남은 길은 오이디푸스처럼 '추방'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복수를 결심한다. 추방의 출발점이 된 최민식에게,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되돌려주기로 결심한다.
첫번째가 감금이다. 그 자신이 공동체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듯, 유지태는 최민식을 사회로부터 격리/추방시킨다.
자신이 겪었던 소통의 단절, 해명의 기회도 없었고 연인을 살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공동체에 대한 복수를 그는 최민식에게 되돌린다. 너도 단절당해봐라. 내 운명이 너로 인해 비틀어져 버렸듯이 이제부터 네 운명의 신은 나다. 그리고 두번째의 복수가 이어진다. 그것이 근친상간이다. 최민식역시 유지태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집착한다. 몇일간의 추적끝에 그는 유지태가 왜 그러했는지를 알아내고, 유지태를 찾아간다.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입놀림이 문제이긴 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누이를 사랑한 네게 있다고. 그러나 유지태는 증명한다. 최민식 또한 유지태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증명한다.
최민식은 자신의 혀를 잘라내고, 유지태는 죽는다. 욕망의 끝, 경쟁자의 끝을 본 그는 이제 더이상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내적으로 중개되고 차곡 차곡 쌓여져 농익어온 욕망/복수가 아니라, 연인을 살리지 못한 초라한 추억일 뿐이다.
복수는 끝이 나고, 그는 살아갈 목표점을 잃어버렸다. 최민식에게 남은 것? 그것은 유지태의 삶일 뿐이다. 근친상간 말이다.
그러므로 올드보이는 교환되지 않는 개인(유지태)의 교환되는 개인(최민식)에 대한 복수극으로 볼 수 있다. 누이를 사랑한 한 예민한 소년이 자신의 욕망을 거세당하고, 복수를 행한다. 그 복수는 교환되는 개인을 교환되지 않는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발설한다. 교환되는 개인들의 공동체가 어디에 서있는지, 무차별화가 어떤 비극을 부르는지 똑똑히 보라고. 이런 점에서 유지태는 희생양이다. 교환되지 않은 개인인 그는 교환되는 개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가장 멋진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 교환되는 개인을 교환되지 않는 개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최민식을 욕망해왔음을. 공동체에서 배제되지 않는, 교환되는 개인을 욕망해왔음을. 유지태가 행한 동태복수는 최민식을 파괴시켰을 뿐 아니라, 유지태 자신까지 파괴시켰다. 그것이 교환되지 않는 개인과 교환되는 개인과의 무시무시한 짝패관계이다.
[아직 우리는 용서할 때가 아니다 ]
아마도 박찬욱은 르네 지라르의 팬일 것이다. 지라르처럼, 그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내고(도스도예프스키의 말마따나 '조화의 느낌이란 1초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가 그 이상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개인의 복수건, 사회의 복수건간에. 그러나, 그는 지라르처럼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때 사랑과 용서는 그냥 사랑과 용서가 아니다. 우리의 잔인함을 인정한 후의 용서이다. 박찬욱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우리는 용서할 때가 아니라고.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잔인함과 분노를 더이상 ‘없는 것처럼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발설하고 토론하고 대화할 때이며, 그것은 용서를 준비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이 우리나라가 아닌, 혹은 현실적이지 않은 곳에서 촬영된 이유는 혹시 그것 때문 아닐까.
※ 글 : 마쓰모토 mythos 의 글 갈췌
[결론적으로 박찬욱 감독은 예술가이고 철학자이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이 모두 ‘복수’에 대한 영화이며, 지금 준비하는 작품도 ‘복수’에 대한 영화라고 들었다. 복수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있는가?
"복수라는 소재는 고대 신화나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지금 오락 영화에 이르기까지 즐겨 다뤄지는 소재다. 특별히 내가 복수라는 소재에 집착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현대 사회에서 사적인 복수나 앙갚음은 금지되어 있지 않나. 금지된 것에 대해서 한번쯤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술가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복수는 나의 것>이 건조하고 차가운 톤의 영화라면, <올드보이>는 습도가 높고 뜨거운 영화다. 복수 완결편이 차기작은 지금 시나리오 쓰기를 막 시작해서 어떤 영화가 될지는 전혀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내용이다."
위에서 보듯이 박찬욱 감독은 금기시 되어진 어떠한 부류에 도전하는 예술가이자 철학자인 것 이다.
누구도 하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도전 정신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설정해가는 이시대의 또 한명의 철학자일것이다.
[복수는 나의것],[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이세편의 영화는
이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한두가지의 원한을 가지고 있고 복수심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네들의 복수심에 대한 경학을 일으키거나 잘못된 복수심의 말로를 표현함으로써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듯한 영화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시리즈는 자신의 철학을 담은 영화일것이다.
우리 모두의 복수심 표출을 대리로 해주는 매개체 역할의 영화일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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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7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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