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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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1. 세계공황과 일본

2. 우가키 총독의 󰡐조선공업화󰡑 구상
⑴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의 공업인식
① 기층계급의 투쟁에 대한 대응
② 조선인 민족운동 및 공업화론에 대한 대응
⑵ 우가키식 공업화론의 역사적 의미

3. 조선인 노동자의 증가와 제약된 성장

4. 식민지 공업화의 특징과 한계

본문내용

30년대에 들어서면 광산 및 토목건축업, 중일전쟁 이후에는 금속공업과 기계공업 분야에서 기술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에서는 기술자를 자체 조달할 수 없었다. 합병이래 고등기술교육을 억제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으로 기술자 양성에 필요한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기술자의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 이입된 기술자로 충당되었다. 1939년경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체 기술자의 90%는 일본인이었고, 그 대부분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기술자 및 기능공 정책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중화학공업 및 군수공업의 발달로 기술인력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는 가운데 일본인 기술인력의 일부가 징집당한 반면, 신규 기술인력의 공급은 급감두절됨으로써 기술인력의 수급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총독부는 고등기술학교의 신증설과 더불어 갑종 및 을종 실업학교와 직업학교제도를 통해 기능공 방출을 강화하고 직업훈련을 통한 기능향상에도 힘썼다. 이로써 조선인 기술자는 1942~44년간에 1,215명에서 1,632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42년 조사에 의하면 공업 부문에서 조선인은 기술자의 18.1%, 노동자의 92.9%를 점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 기술인력은 성장했으나상위직은 일본인, 하위직은 조선인이라는 식민지적 고용구조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4. 식민지 공업화의 특징과 한계
1930년대 초조선공업화는 지주에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농업정책으로는 더 이상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 조선 내의 사정과 카르텔에 의한 통제가 시작되면서 해외로의 자본진출을 노린 일본 자본가들이 조선을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1937년 일제의 중국침략을 계기로 조선이병참기지로 규정되면서 이제 더 이상 조선의 독자적인 필요나 경제논리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일본의 필요에 의해 모든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식민정책의 변화과정은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자원과 생산력을 고갈시키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해방 후의 경제재건에서 더욱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1930년대 이후 조선에서 전개된 식민지 공업화의 특징과 그것이 조선경제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본 독점자본이 주도하던 공업화와 전시체제의 틈새에서 성장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점차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공업화정책 시행 이후 농업정책이 전환되면서 유산층의 자본투자처가 다양화되고 일제침략의 부산물로서만주붐이 조성되는 동안은 당연히 조선인이 운영하는 공장이나 회사도 늘어났다. 그러나 전시체제로 접어들고 특히 전황이 악화되면서 이들의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조선인 자본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정책운용에 개입할 여지도 능력도 없이 일본 또는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전쟁동원 정책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군수업종에 관련을 가지면서 기업을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조선인 자본의 대부분은 결국 기업정비 단계에서 도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역사의 전면에서 사회를 이끌어가기보다 민족의식을 버린 채 일제에 예속된 가운데 모색한 부의 축적은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고, 사회구성원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리더십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한국 자본가그룹이 안고 있는 본질적 한계로서, 오늘날까지 불식되지 못한 자본가그룹의 천민성부패성대외의존성은 이러한 역사적 연원에서 배태되었다.
둘째, 조선인 노동자들은 미숙련 단순노동에 집중됨으로써 공업화에 따라 파생적으로 나타나는 기술이전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식민지 공업화에 따라 공장 수가 급증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도 당연히 급증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빈농 출신의 미숙련 단순노동자였다. 기술자에 대한 수요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급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공업화에 필요한 기술자는 대부분 일본인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다. 기술자들이 전쟁에 동원되는 비상사태에 이른 일제말기에 이르러서야 조선인에 대한 기술교육이 이루어졌지만, 단순노무직에 머문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준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반농반공(半農半工)의 계절노동자들이 많은 점도 식민지 공업화에 따른 취업구조의 변화가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기술이전의 제한은 자본가에게서도 나타났다. 틈새 경제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은 기술력이나 자본규모가 필요한 업종이 아닌 부문에서만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경쟁력을 가졌을 뿐, 대자본과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부문에는 진입하지 못했다.
셋째, 조선의 공업화는 전시물자 동원의 일환으로 군수공업이나 이에 종속된 부문에 집중된 채 급속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조선경제 내에서 상호 연관성을 가진 재생산구조를 형성할 수 없었다.대동아공영권의 일원으로 군수물자 생산의 요충지로 규정되면서 광공업 생산이 급증했지만, 이는 경제논리와 무관하게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후 평화산업으로 전환하는 데도 장애요인이 되었다.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된 광산의 경우 해방 후에 대부분 가동이 정지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군수산업 내에서도 부문간의 유기적 연관이 없이 값싼 전력과 노동력에 바탕을 둔 일본 독점자본이 전시 초과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부문만이 확대되고, 확대재생산 확보에 필수적인 기계기구공업 부문은 배제되어 결국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남았다.
넷째, 식민지 조선경제는 일제가 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대응하여 구축한 군수물자의 자급에 초점을 둔 엔블록경제권에 수동적으로 편입된 채 물자인력자금에 대한 무한적 수탈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식민지 조선에서 공업의고도화는 곧 극단적인 통제경제를 동반한 것이다.
<참고문헌>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군현대사》, 플빛, 1996, 서울
강만길,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1, 서울
강만길,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0, 서울
김인호, 《식민지 조선경제의 종말》, 신서원, 2000,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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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08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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