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중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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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시대의 중요사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1세기 이후 봉건사회의 안정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로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여 봉건 사회는 내부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고, 십자군 전쟁은 이를 촉진시켰다. 그리하여 14세기에는 봉건 사회가 붕괴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들이 성장하였다.

(1) 십자군 전쟁(十字軍 戰爭)
◎ 1차 십자군 (1096-1099)
◎ 4차 십자군- 라틴제국 건설 (1202-1204)
◎ 소년 십자군 (1212)
※ 십자군 운동의 의의와 결과

(2) 도시 발달과 상공업의 부흥
① 원인
② 길드
◎ 수공업 길드
③ 상공업의 발달

(3) 장원제의 동요(봉건사회의 붕괴)
① 원인
※ 지대의 변화 - 화폐지대
② 경과 : 농민의 지위향상

※ 흑사병(Black Death)
① 흑사병
② 흑사병에 대한 반응
③ 결과
※ 흑사병과 문화
③ 봉건 제도의 붕괴

(4) 교황권의 쇠퇴

(5) 중세말 유럽의 정치적 변화: 중앙집권국가의 출현
① 왕권의 강화
② 신분제 의회
③ 백년 전쟁(1337-1452)
※ 잔 다르크(1412∼1431)
◎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 장미전쟁(薔薇戰爭)
④ 독일과 이탈리아
◎ 영방국가(領邦國家)
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본문내용

6세(재위 1328∼50)로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대하여 필리프 4세의 외손인 영국왕 에드워드3세(재위 1327∼77)는 자신이 상위 계승자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펴면서 양국의 외교전이 불을 뿜던 끝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년 동안 전쟁이 줄기차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실제로 전쟁이 있었던 기간을 그리 많지 않습니다.전쟁은 시종 영국군이 우세하였으며 영국군은 대포와 커다란 활을 가진 보병으로 중무장하여 프랑스 기사들을 무너뜨렸습니다.전쟁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는 몇번이나 바뀌었습니다.프랑스의 샤를6세가 죽고 영국군이 오를레앙을 총곡격 포위하여 프랑스의 운명이 풍전등화일때 등장한 영웅이 잔다르크입니다.백마를 탄 17세의 잔다르크의 진격은 오를레앙을 포위당한지 무려 209일 만에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프랑스 군에게 용기과 애국심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비록 잔다르크는 영국군에게 붙잡히어 마녀라는 누명으로 화형당하고 말았지만 프랑스 군은 1453년 드디어 보르도에서 영국군을 몰아 내는데 성공함으로써 백년전쟁은 프랑스 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에 비하여 장미전쟁은 영국 내부의 왕위 계승내전을 말합니다. 영국의 봉건귀족인 랭카스터와 요크 두 왕가 사이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내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년 동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 명칭은 요크파가 흰장미, 랭카스터파는 붉은장미가 문장(紋章)인 것에서 유래하는데, 내란 당시는 요크파의 흰장미만이 사용되었습니다. 내란의 원인은 랭카스터왕조 헨리 6세의 정부가 약체화되었고, 백년전쟁의 종결(1453)에 따른 귀환병이 증가함으로써 팽창한 무장호위대를 거느린 대귀족들이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데 있었다. 이들 대귀족은 헨리 6세를 지지하는 파(지도자는 서머셋공)와 요크공(公) 리처드가 이끄는 반국왕파로 나뉘어 대립하여 무려 30여년을 싸우게 됩니다. 지금도 영국 왕실의 문장은 붉은 장미와 흰장미가 조화를 이루며 새겨져 있습니다.결과는 랭카스터파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 헨리(튜더家)가 망명중 귀국하여 85년 보즈워스싸움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왕 헨리 7세에 즉위함으로써 튜더왕조를 열었고 두 왕가의 내란은 끝이 났습니다.백년전쟁과 장미 전쟁은 중세시대의 종말을 가져 오는 전쟁이었습니다.전쟁의 와중에서 중세 기사들이 대거 몰락하였으며 사람들은 애국심과 희미하나마 국가 의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또 프랑스는 상비군(常備軍)을 창설하게 되었고, 제후 세력을 억제하기 시작하였고 영국도 튜더왕조에 의한 절대왕정이 수립됨으로써 중세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 장미전쟁(薔薇戰爭)
1455∼85년에 있었던 영국의 내란. 랭커스터왕조는 개조(開祖)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3대째인 헨리 6세 때 요크공(公) 리처드가 랭커스터왕조 이상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다면서 궐기하였으며, 여기에 귀족간의 싸움이 결부되어 내란이 일어났다. 이 내란의 본질은 귀족전쟁이라는 점에 있다.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은 랭커스터가(家)가 붉은 장미,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문장(紋章)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 것. 백년전쟁에서 쇠약해진 귀족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귀족들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여기에 대헌장 이래로 위축되었던 왕건이 어부지리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④ 독일과 이탈리아
독일 : 제후 세력의 강성 - 서임권 투쟁 → 황제권 약화, 황제는 이탈리아 경략에 주력하여 독일에 소홀.
·대공위 시대(1256-1273) : 황제가 없는 시대
·카를 4세 : 황금문서 발포(1356) - 7명의 유력 제후(선제후)에 의해 황제가 선출됨
·분열 상태 : 제후와 자치 도시 등 300여개의 지방 분권으로 분열(영방 국가)
◎ 영방국가(領邦國家)
중세 독일의 지방국가. 독일(신성로마) 황제는 교황과의 성직 서임권 투쟁과 이탈리아 정책에 정력을 소비하여 약체화되었고, 13세기 이후 지방 제후(諸侯)에게 양보를 거듭하여, 왕권에 소속되는 각종의 주권사항을 위양(委讓)하였기 때문에, 지방 제후령은 독립된 주권적 영방을 형성하였다. 이것이 영방국가이며, 13세기 이후 그 수가 약 300이나 되어,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방국가 주권이 국제적으로 승인되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도 각각 영방국가의 하나이다. 이 영방국가가 국가적 분열을 극복하게 된 것은 1871년 독일제국(帝國) 창건에 의해서이다.
이탈리아 : 교황령, 도시국가로 분열, 십자군 전쟁 후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번영
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 이슬람 세력 축출(12세기) -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성립
에스파냐 :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합(1479) → 그라나다 점령(1492)으로 이슬람 축출 → 중앙집권국가 건설.
포르투갈 :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후 제후 세력을 누르고 15세기 후반 중앙집권국가 형성
※ 에스파냐, 포르투갈
8세기 이후 수백년 동안에 걸쳐 그리스도교도들은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엣 몰아내고자 치열한 싸움을 했다. 외부의 적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국왕과 귀족이 대립하기보다는 결합해야 했으며, 아울러 강력한 지도력 혹은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유럽의 여타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방분권 및 약한 국왕 이라는 봉건제의 고유한 특징은 일찍이 사라졌다. 국내의 분쟁이 거의 해소되었으므로 제일 먼저 해외 팽창의 대열에 뛰어들게 되었다.
한편, 외형상으로는 중앙집권이 일찍 이루어졌으나 '건전한 시민층의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번영을 오래 구가하지 못하고 일찍 몰락하는 계기도 되었다.
※ 십자군 전쟁의 기본적인 배경은 10∼11세기에 걸친 유럽 사회의 안정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인구 증가로 유럽의 새로운 활기와 에너지가 넘쳐 흘렀던 점이다.
※ 중세 유럽 봉건 사회의 동요와 붕괴: 10∼11세기에 걸친 유럽 사회의 안정으로 농업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잉여생산물의 증가 → 시장경제와 화폐 경제의 발전 →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이 나타나 자급자족적인 장원제에 기초한 봉건사회를 흔들어 놓았으며, 여기에 더해 십자군 전쟁은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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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12
  • 저작시기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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