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향가 형식][향가 표기][향찰][향가 배경][향가 자연물 상징][향가 특징]향가 분석 고찰(향가의 형식, 향가의 표기, 향가의 특징과 성격, 향가에 나타난 자연물의 상징, 향가의 배경과 작품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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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가][향가 형식][향가 표기][향찰][향가 배경][향가 자연물 상징][향가 특징]향가 분석 고찰(향가의 형식, 향가의 표기, 향가의 특징과 성격, 향가에 나타난 자연물의 상징, 향가의 배경과 작품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향가의 형식

Ⅲ. 향가의 표기
1. 향찰(鄕札)
2. 이두(吏讀)

Ⅳ. 향가의 특징과 성격
1. 향가의 특징
2. 향가의 성격

Ⅴ. 향가에 나타난 자연물의 상징
1. 원형(Archetype)의 개념
2. 향가에 나타난 원형 상징
1) 달의 이미지
2) 식물의 이미지

Ⅵ. 향가의 배경과 작품분석
1. 향가가 지어진 시대적 배경
2. 균여의 보현시원가
3. 예종의 도이장가
4. 정서의 정과정곡

Ⅶ. 결론

본문내용

대단하다. 이렇게 많은 잡품을 남긴 사람이 신라때에는 없었다. 월명사난 충담사쯤 되면 노래짓는 것을 업으로 삼았겠지만,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은 두편씩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균여는 자기 직분을 시인으로 삼은 사람이 아닌데도 지은 노래를 고스란히 전할 수 있었다.
3. 예종의 도이장가
도이장가를 지은 사연을 살펴보자 예종이 1220년에 서경에 가서 팔관회를 보는데,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을타고 뛰면서 뜰을 돌아다니더라고 했다. 이상하게 여겨 묻자 좌우에서 “이분들은 신숭겸, 김낙 입니다”하고서 행사의 내력을 설명했다. 그러자 슬픔에 잠겼던 예종은 감격해서, 두 공신의 후예를 묻고서는 한시와 함께 향가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력과 지은 작품이 ?장절공유사?라고 줄여서 부를수 있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은 가셨으되 몸 세우고 하신 말씀
직분 맡으려고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오래 곧은 자취를 나타내신저
향가는 단가이장이라고 했다. 단가는 토막노래이고 이장은 두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이다.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감격을 바로 나타냈기에 사뇌가 형식을 갖출 겨를이 없었고,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단락지우느라고 토막 노래 둘을 만들었던 것 싶다.
“몸세우고 하신 말씀”은 일어선 거동을 말하고 “직분 맡으려고”이하는 뜰을 돌면서 춤을 춘 것을 그렇게 한 행위라고 보았다는데 근거를 두었다. 마음, 넋, 몸을 나누어서 말해서 주목되는데 죽었으니 넋이 갔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친 다고 했으므로 마음은 죽은 다음에도 남아 있다고 한 것을 알수 있다.
도이장가는 안정되지 못한 작품으로 넉줄향가가 아니라 두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두부분사이에 균형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죽은사람을 추모하는 노래의 오랜 전통을 이었더라도 향가 본래의 격식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예종이 지은 벌곡조를 살펴보면 예종이 자기 잘못이나 정치의 득실을 알고자해서 언로를 크게 열었으나 신하들이 두려워 말을 하지 않자 그 노래를 지어 신하들을 풍자했다.
비두로기 새? 비두로기 새? 우루믈 우루?
버곡더이? 난 됴해 버곡더이? 난 됴해
대체로보아 두줄 향가로 부각되었던 민요형식이다. ‘비두로기’는 비둘기이고 ‘버곡더’은 뻐꾸기이다. 비둘기도 울음을 울지만 뻐꾸기가 좋다는 말이다. 예종이지은 벌곡조에 견주어 보면,
자기 잘못이나 정치의 득실을 솔직하게 말하면서 신하들이 뻐뀌처럼 울어줄 것을 기대했는데 비둘기인양 울고 말았다고 풍자한 뜻이 된다.
4. 정서의 정과정곡
정서는 일찍이 이자겸의 권세에 맞서고,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개경쪽에서 공을 세운 아버지 정항 덕분에 음사로 진출해서 벼슬이 정5품인 내시낭중에 이르렀다. 인종에 이어서
자기와 이질인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참소를 입어 1151년에 고향인 동래로 귀양가게 되었다. 소환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지었다. 노래를 지은 연대는 1156년 전후가 아닌가 추정된다.
내 니믈 그리?와 우니나니
山 졉동새난 이슷?요이다
아니셔며 거츠르신? 아으
月曉星이 아?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힛 마리신뎌
?읏 븐뎌 아으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셔
처음 두줄에서 님을 그리어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산에 사는 접동새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 다음 두줄은 자기 죄가 임금이 잘못 알고 있는 바와 다르고 사실은 참소를 당해 허망하다는 것을 남은 달 새벽별이 바로 알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널이라도 한데 가고 싶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엿던가 하며 그런 언약을 어기고 임금이 자기를 버린 것을 원망스럽게 여겼다.
악조 구성을 나타내는 말을 살피면 처음 석줄이 전강, 중강, 후강을 이루고 그 다음의 것들은 엽이라해서 거기 붙어 있는 부분들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정과정곡?이 사뇌가의 잔존형태라는 견해의 근거가 된다. 향찰로 표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무제지만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향찰표기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사뇌가 본래의 격식과는 아주 달라진 데가 있으니 바로 감탄구가 놓인 위치이다. “니미 나?”하는 말앞에 와야 할 감탄구가 “아소 님하”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사뇌가가 해체되는 모습을 살펴볼수 있다고 하겠다.
Ⅶ. 결론
불교는 신라의 국교였고 따라서 향가에는 당연하게 불교 계통의 노래가 많았다. 더욱이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승려였고 《삼국유사》의 편찬에 있어서도 불법 교화의 의도가 충분히 작용했을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하였다. - 신라인의 불교관이 순수한 불교적 신앙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관음신앙에 의지해 아들의 득안을 기원한 희명도, 현세적 세계에서 탈피하여 내세지향적인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광덕 등등, 이들의 신앙은 주술 또는 무속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연이 향가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향가가 갖는 주술성이나 그 효험에 대해서 신라인들이 얼마나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는지를 추측할 수가 있다. 그리고 <혜성가>나 <도솔가>를 통해서 향가가 갖는 주술성이 천상계나 인간 세계에 조성된 변괴를 물리치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향가에서의 주술성은 불교사상만큼이나 많은 사상적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국가에서 관장하고 교리로써 다스리는 것이 불교였다면, 민중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발원의 기반으로 삼았던 것은 주술적 사고관이었다. 그리고 그 주술적 사상을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발전시켜준 것이 불교였다고 정의를 내려도 무관할 것이다. 그리고 ‘향가’라는 주술적 수단을 통해서 작게는 개개인의 발원과 크게는 국가의 안정과 염원이 구체화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키워드

향가,   이두,   향찰,   상징,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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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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