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왕과 우리나라의 상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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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치우천왕과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치우천황과 우리나라의 상고사

*치우천황은 누구?
1. 탁록대첩의 원인
2. 전쟁의 진행과정
3. 탁록대첩(鹿大捷)
4. 황제(黃帝) 헌원(軒轅)
5. 다른 자료
6. 중국 고서에 나온 치우천황에 대한 기록
- 중국에서의 연구동향 (조육대)
7. 재야 학파쪽의 우리 상고사 요약
- 조선 상고사와 치우천황 연구가들의 연구기록
8. 첨부
9. 분석결론

본문내용

아들
한밝산 북녘에 비서갑(斐西岬)이란 땅이 있었는데, 여기서 한배웅 천왕이 대대로 농사도 짓고 사냥도 하였다. 뒷날에 곰겨레(熊族)의 여자 임금이 한배웅의 믿음을 얻어, 여러 대로 비서갑 땅의 임자 노릇을 하였다. 이 곰겨레의 갈래로써 고시(高矢)씨의 자손인 소전(少典)이 있었는데, 8대째 임금인 안부련 한배웅(安夫連桓雄:앞928-앞837;앞3,260-앞3,169)께서 그를 강수(姜水)로 보내어, 군사를 감독케 하였다. 소전의 아들이 염제 신농(炎帝神農)인데, 이이가 뒷날 열산(烈山)으로 옮아갔다.
* 염제 신농의 농사짓기와 약 만들기
염제 신농이 강수의 가에서 나고 자라난 까닭에, 성을 강(姜)씨라 하였다. 그가 태호 복희의 여동생인 여와씨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그는 나무를 다듬고 굽혀서 장기와 호미를 만들어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백가지 풀들을 맛보아 약을 비로소 알아내고, 또 낮에 저자(市場)를 열어 물건들을 바꾸게 하였다. 그는 또 5줄의 비파를 만들고 8괘를 곱하여 64효(爻)를 만들었다.
* 갈고 한배웅의 나라 경계선 정하기
배달나라의 10대째 임금인 갈고 한배웅(葛古桓雄, 瀆盧韓:앞763-앞638;앞3,095-앞2970)때에 이르러 염제 신농의 자손 나라와 경계선을 정하였다. 그때 공상(空桑)의 동녘 땅은 배달나라의 것으로 하였는데, 이 공상은 현재 중국 하남성 진류현(河南省 陳留縣)에 있다.
** 14대째 임금 자오지 한배웅인 치우 천왕
* 자오지 한배웅 치우 천왕의 구리머리와 쇠이마
14대째 임금을 자오지 한배웅(慈烏支桓雄)이라, 또는 치우 천황(治尤天黃)이라 하였다. 치우 천왕의 가까운 친척이 81사람인데, 이들은 모두가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 치우 천왕은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가졌을 뿐더러, 백 가지 재주를 가져 모래와 돌을 먹을 수 있고, 안개를 내게 하며, 구리와 쇠로써 칼, 창, 활 등 여러 가지 병기(兵器)들을 만들었다.
* 염제 유망과 황제 헌원을 무찌름
치우 천왕이 군대를 일으켜 염제 신농의 8대 손자인 염제 유망(炎帝楡罔)의 서울인 공상(空桑)을 치고, 회대(淮垈, 하남성과 산동성)의 땅을 점령하니, 염제 유망이 탁록성(鹿城)으로 달아났다. 이때 안부련 한배웅이 고시(高矢)의 후손인 소전(少典)을 부하로 삼았는데, 이 이의 후손인 공손 헌원(公孫軒轅, 黃帝軒轅)이 탁록성에 살면서, 괴수 노릇을 하였다. 이 이가 군대를 거느리고, 치우 천왕과 전쟁을 시작하므로, 치우 천왕께서 소호 금천(少昊金天)을 보내어 탁록의 유웅(鹿有熊)의 들에서 헌원의 군대를 무찌르고, 기주(冀州:열하성과 하북성)와 연주(州)와 회대(淮垈)를 차지한 뒤, 헌원의 무리들을 물리쳤다.
* 치우 천왕의 묘소 있는 산동성
치우 천왕이 10년 동안에 황제 헌원과 70번이 넘게 전쟁을 치루었다. 헌원이 차차 치우 천왕의 병기(兵器)와 전술을 본뜨고, 또 지남차(指南車)까지 만들어 전쟁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치우 천왕의 친척으로 부장수가 된 치우 비(蚩尤飛)가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것을 사기(史記)에서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적었다.
치우 천왕이 희대 땅을 지키다가, 불행히 돌아가니, 산동성 동평군(山童省 東平郡)에다 7길(七丈, 七十자)이나 높은 묘를 쓰고, 진-한(秦漢)시대까지도 동이겨레(東夷族)의 풍속을 따라 10월 묘사(墓祀, 시사)를 드렸었다. 현재 대만에 있는 자유 중국의 중-고등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선 황제 헌원을 중국 사람의 시조로 삼고 있다.
배달한배웅 임금들의 연대표
1대 거발한배웅 (B.C. 3898)
2대 거불리한배웅 (B.C. 3804)
3대 우야고한배웅 (B.C. 3718)
4대 모사라한배웅 (B.C. 3619)
5대 태우의한배웅 (B.C 3512)
6대 다의발한배웅 (B.C. 3419)
7대 거련한배웅 (B.C. 3321)
8대 안부련한배웅 (B.C. 3240)
9대 양운한배웅 (B.C. 3167)
10대 갈고(독로한) (B.C. 3071)
11대 거야발한배웅 (B.C. 2971)
12대 주무신한배웅 (B.C. 2879)
13대 사와라한배웅 (B.C. 2774)
14대 자오지(치우) (B.C. 2707)
15대 치액특한배웅 (B.C. 2598)
16대 축다리한배웅 (B.C. 2509)
17대 혁다세한배웅 (B.C. 2543)
18대 거불단한배웅(단웅) (B.C. 2381)
- ‘우리나라 6천년’13~44 page
8. 첨부
동두철액(銅頭鐵額): 치우천황에 관한 모든 중국측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치우천황이 동두철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두(銅頭)라 함은 구리쇠로 된 머리라는 뜻이며, 철액(鐵額)은 쇠로 된 이마란 뜻이다. 아직 철(鐵)의 발달이 원시적인 상태의 중국인들의 시각으로 치우천황의 철제투구에 철갑옷을 입은 모습을 동두철액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것은 배달국과 황제 헌원의 시기가 신석기가 아니라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과 우리민족의 철기역사가 중국보다 앞서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2천년은 앞당길 수 있는 증거중 하나라는 이야기이다.
9. 분석결론
동북아 대공정이니 식민사관이니 한국의 상고사의 역사는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치우천황과 같이 상고시대 아시아를 움직일만한 전투에 승리하고, 또 동북아의 맹주이자 최고 실력자로서 자리매김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이름을 깎아내린다는 이유로 전투에서 지고, 잡혀서 목이 잘렸다는 왜곡된 역사로 기록되기도 했다.
물론 앞서 언급된 고서적중 대다수가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 사서에 포함되긴 하지만, 결국 역사는 승자에 의해 씌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서라고 덮어놓고 무시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결국 힘없는 후손들에 의해 자신의 찬란한 역사가 지워지고 왜곡되었을 우리 조상님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구려는 중국의 한족을 대다수 포함한 나라였다는 중국측의 주장에 눌려 중국변방의 한 나라로 치부될 위험에 처해있고, 치우천황역시 중국의 조상신 중 한명으로 잘못 기억되어 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올바른 역사에 대한 인식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속에 자리잡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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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3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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