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를 읽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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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를 읽고나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문(요약본)
1장. 서론: 발명하기, 망각하기, 기억하기
1부: 국가적 미장센
2장. 행재소에서 제국의 수도로
2부: 근대천황의 패전트
3장. 황실의례 꾸며내기
4장. 일본의 근대성과 천황제
3부: 국민
5장. 군중과 황실 패전트
6장. 에필로그: 현재의 역사를 향하여

Ⅲ. 결론

본문내용

참여했던 전직 아나운서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현장 리포터들이 하듯이 본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일이라기보다는 행사의 순간에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보도를 들었다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패전트는 그 자체의 일시적인 순간을 넘어서 국민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시간 공유감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재생산해 왔다. 일본의 패배가 가져온 상징적 위기는 엄청났지만, 전후 정부와 미군정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국가 공동체 통합의 상징인 천황제를 서둘러 재건하기 시작했다. 전후의 새 헌법, 순행 등은 메이지 초기를 연상시키듯 역사의 신기한 반복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메이지 시대처럼 전후의 첫 번째 국가의례는 단지 헌법 발포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던 것만은 아니며 그 의례형식은 메이지 시대의 선례를 거의 답습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패전트를 통해 남성화된 군주가 만들어지고 그를 정부의 수반, 심지어는 정부를 초월해 있는 영웅적 통치자로 상상할 수 있었던 메이지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전후의 순행의례이미지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쇼와 천황을 연약한 인물로 보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그를 ‘상징천황’으로, 즉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국가 전체를 표상하는 천황으로 만드는 과정의 일부였다. 백마를 타고 가는 역동적이고 남성화되고 군인화된 인물 대신에, 이 군주는 해양생물학, 시, 스포츠관람, 그리고 심지어 1975년의 디즈니랜드 방문과 같은 평화스런 일에 몰두하는 양복과 중절모차림의 민간인이 되었다. 그의 이미지는 수동적인 것이 되었다.
일찍이 1971년 도쿄 외신 기자단과의 대담에서도 전쟁책임문제에 관해 쇼와 천황은 정치적 사안에서 모든 것을 잘 아는 행위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고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미군정 말기에 미국정부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일부 패전트들이 부활했으며 이는 미국의 냉전정책과 일본 보수정치가들의 목표가 전후 일본에 사회통제를 재건한다는 점에서 일치함에 따른 결과였다.
1950년대부터 일반인의 관심은 전쟁으로 얼룩진 천황으로부터 좀 더 ‘순수한’ 아키히토 황태자(지금의 천황)로 옮겨갔다.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아키히토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식은 황실을 민주적일뿐더러 (쇼다 미치코가 귀족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로맨스의 중심이 될 수도 있을 만큼 밝고 명랑한 현재와 미래를 나타냈다. 이를 비롯한 황실의 패전트들을 통하여 상징천황과 그 가족의 이미지가 연예계의 스타처럼 되고, 미디어가 유명 인사들에게 일종의 천황적인 아우라를 부여하는 세상에서 전후의 황실은 점점 하찮은 것으로 되어갔다.
천황의 응시
일본 천황제의 변화된 지위는 천황의 응시라는 간략한 역사를 통해서도 판단할 수 있다.
근대적인 천황의 응시를 모성적이냐 가부장적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이해하자는 말이 아니다. 천황의 응시는 가부장의 응시와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동시에 갖추면서 모호하게 성별화 되었던 것이다. 시선과 권력의 관계에 나타난 변화로서 천황은 더 이상 능동적으로 보는 주체나 행위자로서 마상에서나 높은 단과 같이 우뚝 솟은 위치에서 군중들을 굽어보기 위해 니주바시를 넘어가는 일이 없다. 대신 베란다에서 수동적으로 손을 흔들며 몇 마디 덕담을 읊조리는 천황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니주바시를 넘어서 궁성 입구로 밀려들어간다.
특히 195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소비자본주의와 인쇄전자 미디어 형식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신종 관음증(voyeurism)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 국민과 천황제 사이의 지배적인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일본이 더 이상 규율사회가 아니라거나, 황실이 더 이상 국민적 정체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지배망의 정점에 있었던 천황제가 그 지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현재 점차 탈중심화되고 있는 권력은 천황이 그의 응시로 국민을 규율화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정 아우라를 상실한 천황가족은 엿봄으로써 작동한다. 이런 상황의 정치적 항의는 모호하다. 한편으로 천황의 아우라가 상실되면서 근대에 천황과 황실이 상징해 왔던 국민적인종적 본질, 통일성, 순수성 등에 대해 재고할 가능성이 열렸다. 달리 말해서 이 근대적 ‘전통’의 아우라를 약화시킴으로써,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누구의 전통인가?’라는 물음이 간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문화의미역사기억이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해짐으로써, 특히 전후의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기적이 스스로 붕괴함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귀속간과 진실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실제로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이런 노력의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는 고도성장 혹은 산업화 이후의 일본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경향, 즉 국가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신념들이나 네오내셔널리즘(neo-nationalism, 신민족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Ⅲ. 결론
‘현인신’이라 불리는 일본천황은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일반대중에게조차 생소한 대상이었다. 오히려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격화된 존재로서 민간신앙 속의 신(神)과 흔히 혼동되었다. 그랬던것이 메이지 시대 이후 국가지배엘리트계층에 의하여 의도적이고 조작적으로 천황의 이미지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강인하고 주체적인 서양식 남성 지도자의 모습으로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지배층에 의하여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근대 일본의 천황의 이미지와 그를 중심으로 한 각종 패전트(pageant)-헌법 발포식, 천황의 은혼식 및 결혼식 등등-를 통하여 일본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사회를 하나로 규율하고, 국가에 대한 국민의 충성을 끌어내어 ‘우리가 곧 국가이다’라는 식의 일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세계 1, 2차대전 때에는 일본국민과 군인, 가미가제(神風)특공대 등이 국가를 위하여 자살행위를 서슴지 않도록 하는 국가에의 절대충성의 결과도 낳았다. 21세기인 현재의 일본에서 예전의 그 권위와 아우라를 많이 상실한 천황일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일본 국가 공동체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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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7.03
  • 저작시기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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