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대원군과 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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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오군란] 대원군과 임오군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임오군란의 배경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3) 대원군의 정권장악과 청국의 개입
(1)대원군의 재집권
(2)청국의 개입
4) 결과
(1)제물포 조약의 체결
(2)청국의 영향력 확대
5) 임오군란의 역사적 의의

3. 결론(한계점 및 느낀점)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고문으로 서울에 왔다. 이들이 내한한 직후 관제개혁이 단행되어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이 설치되었으며 12월에는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고쳤다. 전자는 외교와 통상관련 사무를, 후자는 군국의 기무를 비롯한 내정 일체를 관장하는 기구였다.
청의 간섭으로 조선의 군사제도도 개편되었다.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주도로 장정 1000여 명을 선발하여 신건(新件), 친군영(親軍營)이라 이름하고 이를 좌우영으로 나누었다. 그 뒤 전후영이 설치되어 1884년 7월에는 4영 체제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군란진압 이후에도 청군은 3000여명 정도가 계속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이후 원세개 정권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에 종속화되어 모든 분야에서 청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으며 무분별한 개화정책이 계속 진행됨으로써 국가의 존립 자체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무능력하고 사대적인 민씨 정권의 횡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 임오군란의 역사적 의의
임오군란은 실패하였으나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역사적 사변이었다. 민씨정권의 부패한 통치를 뒤집어 엎을 것을 목적한 반봉건투쟁이었으며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침략 투쟁이었다. 이 폭동은 반침략 반봉건적 성격으로 인하여 그 후의 자주권을 위한 민중의 투쟁역사의 내용과 발전방향을 명백히 밝혀준 뜻깊은 투쟁이었다.
임오군란의 역사적 의의는 첫째는 일본침략자들에게 심해한 정치적군사적 타격을 주었다는 데 있다. 민중은 임오군란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폭동군은 일본군사교관 호리모도를 비롯한 군사 정탐꾼들을 가차없이 처단함으로써 조선군대에 대한 군사훈련지휘권을 더 이상 허용하지않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결과 일본은 그 후 군사분야에서 침략적 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둘째로, 민씨정권에 대해 큰 타격을 주었다는데 있다. 폭동군이 왕궁을 습격하였을 때 국왕은 <돌이켜 보건대 덕이 없는 내가 나라의 큰 자리를 이어받아 마치 백성들을 돌보아주지 못하여 전에 없던 이러한 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그들이 고의로 죄를 범하여 화를 입기 좋아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셋째는 조선민중의 반침략, 반봉건의 의지를 나타내어 민족적계급적 각성을 더욱 높여주었다는 데 있다. 외세는 봉건지배층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나 민중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조선민중은 개항 후 일본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끊임없이 투쟁하였으며 임오군란때 외국군대가 불의에 공격하였을 때에도 서울의 군인들과 민중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지는 않았다.
임오군란을 통하여 민중과 군인들은 더욱 각성되었고 단결력도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임오군란은 그 후의 조선민중의 반침략 반봉건투쟁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임오군란에서 크게 자극을 받은 개화파 인사들과 혁신관료들은 부국강병과 외래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부르조아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으며, 그 실천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3. 결론(한계점 및 느낀점)
임오군란은 민씨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심화된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일어난 군민의 항쟁이었다.
그러나 의식의 미성숙과 이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진보적인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군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재집권한 대원군은 왕궁 공사를 중지시키는 등 과거에 범했던 오류를 극복하여 봉건적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지만 이미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일본과 청의 내적 변화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다.
일본군과 청군이 제각기 자국의 이익과 관련해서 우리나라로 들어오자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청군의 힘에 의지하여 대원군세력을 밀어내고 하층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결국 외세에 의지하여 정권을 회복할 수는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의 정권회복은 조선의 자주 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외세의 침투를 더욱 크게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점차 청국과 일본 양대세력이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길이 트이게 되었던 것이다.
- 참 고 문 헌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김용구/ 원/ 2004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편지/ 박은봉/ 웅진씽크빅/ 2003
조선왕 독살사건/ 이덕일/ 다산초당/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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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07.14
  • 저작시기2007.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0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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