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차문화 - Report ( 송나라와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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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고려의 경제상황 및 송나라와의 연관

2. 본론 : 송과의 교류배경
고려와 송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자료
고려의 차문화
차의 생산과 유통
고려의 차와 도자기 ( 다도 기구)

3. 결론 : 고려와 송의 차문화 교역과 그로 인한 영향.

본문내용

봉단을 귀하게 여겨 송나라 조정에서 내린 것 말고도 시중에서 널리 팔리고 있다” 고 했다. 서긍이 말한 납차가 어떤 것인지는 아직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용봉차는 송나라 궁 안에서만 쓰이던 고급차로써 금박을 용봉 무늬로 오려서 지금의 다식처럼 생겼을 차 덩이 위에 발라서 만든 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나 지금에나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결같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우리 토산차보다는 비싸게 사들인 송나라 고급차가 많이 나돌아서 이른바 사치 풍조가 널리 퍼져있었던 것 같다.
이어서 서긍은 “ 그런 다음부터 고려 사람들은 차를 마시기를 좋아하게 되고 점점 차를 마시는데에 쓰이는 기구들을 알뜰하게 가꾸게 되었다.”고 했다. 차 기구를 알뜰하게 가꾸게 되었다는 것은 차를 마신다는 기호에 더하여 멋을 부리고 예술화 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구절인 것 같다. 서긍은 그가 보았던 고려의 차 기구로써 금가루로 무늬를 내어 구운 검은 유약의 잔과 비취빛이 도는 청자의 작은 찻종과 물을 끓이는 솥과 은으로 만든 풍로 따위를 들고 있었다.
이 글을 보면 고려의 푸른 빛깔이 나는 비색청자나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할 만한 은실을 장식으로 박은 입사처자와 같은 사기그릇이 굽히게 되었던 것도 차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차 기구가 아름답고 사치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차를 마셨던 범절도 까다롭고 지루했던 것 같다. “ 언제나 연회가 있으면 뜰에서 차를 달여서 찻잔을 은으로 만든 뚜껑으로 덮고 조용조용히 거닐어 나른다.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가 고루 나누어진 다음에야 차를 마실 수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때는 언제나 차가 식은 다음이 된다” 고 했을 정도였으니 차를 마시는 범절, 곧 차례가 얼마나 지루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하여 차례가 끝나면 차 그릇은 방안의 붉은 칠을 한 탁자 속에 가지런히 놓여서 붉은 색 비단으로 덮어두었다니, 그냥 참나 마시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고 차 기구를 가까이 차려두고 그것을 감상도 하였던 것 같다.
고려 때의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씩 차를 즐겼고 차를 마신 다음에는 뜨거운 물로 입가심을 했으며 손님들이 대접 받은 차를 남기지 않고 모두 비우면 기뻐하고 남기면 업신여김을 다했다고 하여 서운해 하므로 애써 마시게 된다고 까지 했으니 생활 속에 차지하고 있었던 차의 무게를 알 수 가 있을 듯 하다. 차가 일반에 성하였던 탓도 있었겠으나 「고려사」와「대각국사문집」,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규보의「동국이상국집」,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포은집」과 같은 고려의 여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차의 자취만도 능히 한권의 책으로 꾸밀만한 부피가 되겠다.
고려시대 기록에 보이는 큰 대목중 차의 이름은 오뇌원차와 대차와 그냥 차의 세가지로 서 뇌원차는 토산차이고 대차는 중국에서 들여온 차로 추정되며 차는 산지에 아랑곳없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쓰였다. 이 시대에는 잎차보다는 가루차가 훨씬 더 성했다.
고려(상감)청자 - (茶기구)
서긍일행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아리따운 여인이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 납차, 용봉단차 등 송나라에서 수입한 최고급차와 고려에서 재배한 차가 함께 나왔다. 이처럼 차를 마시며 품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시 개경 상류층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차를 마시는 중앙탁자며 좌우의 선반위에는 구름과 학 무늬를 새겨 넣은 매병, 대나무 죽순 모양의 병 같은 유명한 고려 청자와 역시 청자로 만든 찻그릇이 놓여있었다. 차를 운치있고 정갈하게 마시는 데는 역시 청자가 제격이었다. 청자 만드는 법은 본래 송나라에서 들어왔지만 이자겸 시대가 되면 오히려 고려 청자를 송나라 것보다 더 높게 쳐주었다. 12세기에는 상감청자라고 하여 새로운 기법을 이용한 청자가 제작되고 있었다.
서긍은 훗날 “고려인은 청자색을 비색이라고 하는데, 청자의 조형은 중국과 다른 독창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청자를 고려인은 귀하게 여겼다.” 라며 감탄했다 [고려도경]
http://www.museum.go.kr/kor/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결론
고려는 송과 친선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를 행하였고, 이러한 시대의 분위기가 고려와 송의 茶문화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벽란도’는 고려가 송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와 활발히 교역을 행하였던 대표적 장소이며, 이를 통해 수입된 여러 물품 중 ‘차’는 귀족들을 위한 고급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려가 귀족문화를 대표함을 잘 드러낸다. 고려는 국가 내에서 차를 생산함과 동시에 송과의 무역을 통해 수입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茶 뿐만 아니라 다기구의 발달 역시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청자로 고려는 송으로부터 그릇을 굽는 기술 역시 전수 받았다고 할 수있다. 현재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는 상감기법을 사용하여 오묘한 비색을 나타내는 비색청자라고도 불리며 이는 송으로부터의 기술 한층 위로 고려만의 독자적 기술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고려와 송나라의 차문화는 단순한 문화의 교류를 넘어서 정책적 사회적 분위기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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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고려,   ,   차문화,   다도,   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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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0.14
  • 저작시기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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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3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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