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세종대왕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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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서론 - 시간을 잊은 세종의 위대함

II. 본론
1. 세종의 성과
2. 세종집권기의 시대적 상황
3. 세종의 리더로서의 역량
4. 세종의 부하들

III. 결론
1. 세 가지 요소에 대한 분석
2. 비중의 판단

본문내용

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단단히 기반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 태종은 최적의 신하를 발탁하는 것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세종이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치밀하게 닦아 놓았다. 또한 서거하기 전까지 끊임없는 조언과 지지를 하며 손을 써 주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지지는 지나치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만하기 때문에 자칫 '간섭'으로 치부됨으로써, 유리한 상황을 넘어선 불리한 상황의 이유도 될 것이다. 너무 많은 지지로 세종은 자신의 뜻을 유감없이 펴지 못하고 태종이라는 틀에 갇혀 언제쯤 자신의 소신과 뜻대로 국정을 운영할까를 고민하며 해방을 원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사한 내용에서도 '그가 명실상부하게 임금 노릇을 하게 된 것은 태종이 서거한 뒤인 26세 때부터이다.' 라고 하고 있다. 또한 불리한 상황은 세종 자신에게서 연유하는 것으로써 그의 건강문제를 말할 수 있다. 세종은 '걸어다니는 병원'이라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물론 질병에 시달린다고 해서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건강의 회복을 위해 적지 않은 수고와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것이고, 질병없이 건강한 사람이었을 경우보다는 불리한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년에는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학문을 하는 것에 불리한 상황적 조건이었음은 분명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말년에는 대외적 상황도 뒤숭숭하여 외세의 침공을 받을 위험에 처해있기까지하여 건강의 악화와 더불어 말년으로 갈 수록 순탄치 못한 상황적 요소가 존재했다.
둘째로, 한 사람의 리더로서의 세종에 관한 것이다.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세종은 흔히 볼 수 없는 위대한 경영자이고 리더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위대한 리더가 되기위해서는 다방면의 깊은 지식과, 끈기, 집념, 사고방식, 추진력, 통솔력, 창의력 등이 있어야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그 모든 면에서 출중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 중 무엇하나 빠지면 안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세종의 리더십에서 특히 주의해서 볼 점은 그의 '지식'이라고 본다. 세종은 본인이 알아야 경영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경연에 거의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학문을 닦는데 열성을 기울였다. 국가의 프로젝트, 이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헌신을 한 결과 최고의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여 학자들로부터 학문의 깊이를 인정받았고 그로 인해 지금에 말하는 '지식 경영'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국왕의 조건이기도 했다. 또 한가지 높게 살 점은 그의 '유연한 사고방식'이 아닌가한다. 조선의 유교사회의 풍토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은 획기적인 인재등용을 낳았고 그로인해 많은 분야가 발전하고 조선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국왕들이나 리더들이 추진력과 끈기, 통솔력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기본적으로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부하'에 대한 것이다. 부하에 관한 내용은 세종의 신하들이 세종을 잘 따르고 그에게 충성했는가하는 것과, 그들이 출중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인가하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종 때에는 능력이 출중한 인재가 많았다. 물론 능력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인재를 발탁하는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고 상왕 태종의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정치에 관해 가까이에서 조언을 해주는 훌륭한 신하도 있었으며, 정인지, 신숙주 등 집현전의 많은 학자들은 세종의 지휘를 충실히 따라 그의 업적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세종이 다방면의 분야에서 위대한 유산을 남긴 것은, 그에게 각각의 분야에 출중한 인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 모든 신하들이 세종의 모든 정책에 충성한 것은 아니었다. 단적인 예를 들면, 훈민정음의 창제 후 그것을 반포하는 것에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한 사실이 있다.
(2) 비중의 판단
앞에서 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생각을 바탕으로 판단을 해보자면 전체를 100으로 보았을 때, 한 사람의 리더로서의 세종의 역량은 50으로 그리고 부하의 영향은 30으로, 그리고 여러 상황적 요소는 20으로 즉 식으로 표현하면 <리더:부하:상황=50:30:20> 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좀 더 확연히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리더와 부하' 그리고 '리더와 상황' 으로 묶어보자면 <리더:부하=60:40>, <리더:상황=70:30> 가 아닐까 한다.
근거는 이러하다. 세종은 리더로서의 굉장한 자질과 성품 등을 갖추었고, 출중한 신하들은 대부분의 그의 지휘에 따라주었고 또한 조언도 해 주었으며, 국정을 수월하게 돌보기 위한 상황적 조건은 상왕인 태종의 노력 등으로 잘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 신하들의 공헌으로 자신이 생각한 방안이 뜻대로 척척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왕권이 강화된 상황이었으므로 그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소소한 방해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유산인 '훈민정음'의 반포에 극구 반대한 신하도 있었다는 점, '장영실'등의 인재등용에 의아해하고 반대하는 신하도 있었다는 점, 그의 재위기간동안 나라 안과 밖이 그리 순순하지는 못했다는 점, 자신의 건강문제도 심각했다는 점 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소신과 신념과 의지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나라 국민이 한글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으며, 장영실이라는 인재의 과학적 업적도 우리의 역사에는 없을 것이다. 또한 뜨거운 의지가 있었기에 건강의 악화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끝까지 국정을 돌볼 수 있었지 않겠는가.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부하와 상황이 따르며 무엇하나 빠지면 결과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서 나는 세종의 리더로서의 역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다음으로 신하와 상황 순의 비중으로 그의 리더십과 업적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추진력과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훌륭한 신하도, 상황도 모두 다 헛것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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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0.29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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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3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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