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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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프랑스철학 개관

2. 중세 프랑스철학

3. 17세기 프랑스 철학

4. 18세기의 프랑스 철학

5.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본문내용

장 악한 것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전체적인 사상의 근저에는 神이 인간을 위해 정한 자연의 질서라는 개념이 있다.
마블리(1709-1785)도 카톨릭 승려로 루소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산 상속을 인정했다.
케네(1694-1774)는 경제학자로서 중농주의(자연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사람들)의 대표자이다.
튀르고(1743-1794)는 정치가,경제학자로서 역시『백과전서』에도 기고했다. 케네의 경제설에 가깝고 종종 중농주의자로 분리되며 실험론적 인식론을 주장해 꽁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꽁도르세(1743-1794)는 진보주의와 평등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혁명사상의 철학적 변호사이고 또 수학자였으며 역사에 대해서는 낙관설을 취했으며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확신했다.
바뵈프(1760-1797)는 공산주의를 주창했으며 평등주의에 입각해 정치상의 평등만이 아닌 경제상의 평등까지 목적으로 했다.
5.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프랑스 혁명(1789)이 지나간 후 나폴레옹 시대(1804- 1814)가 오고 그 후 부르봉 王家의 王政復古가 왔다.(1804-1814) 왕정복고는 문화상의 복고, 즉 19세기의 계몽 사상 및 혁명 정신에 대한 反動의 시대가 온 것이다. 여기에 꽁디약의 감각주의의 흐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계몽의 정신을 대표해 18세기부터 19세기에까지 활동한다.
- 感覺主義의 후계자들
드 트라씨와 카바니스(1757-1808)는 이데올로기 학파를 이루었는데 여기서 꽁디약의 감각주의를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했다,
드 트라시는 처음으로 이데올로지라는 말을 사용한 이 학파의 창시자로 이데올로지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변을 거부하고,觀念의 形成을 연구, 설명하는 것을 유일의 과제로 하는 철학이다. 그는 특히 우리의 의식 상태의 외계화를 문제시했다. 결국 이데올로지는 관념의 분석, 그 기원 및 성립을 연구하고 그 성과로부터 논리, 교육, 정치 등에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려고 한 학문이다. 카바니스는 의사로 정신적인 것이 외적 감각에 의존할 뿐 아니라 내적 감각에도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또한 심리적 내면성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생리적 내면성을 내세웠으므로 유몰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드 트라씨의 이데올로지는 합리적 이데올로지로 카바니스는 생리적 이데올로지라 불린다.
베일(1783-1862)은 문학자로 이 두 사람의 큰 영향을 받았다. 스탕달은 또한 니체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데올로지는 혁명 정부에 의해 전격적으로 채용되었다.
- 反動의 哲學
스탈부인과 샤또브리앙은 19세기 전반에 루소의 감성주의 아래에 섰으며 루소와 동일한 의미에 있어 계몽철학에의 반동의 형태를 취했다. 스탈부인은 루소의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의 의의를 인정했으나 단지 철학적 확신과 도덕적 신앙에 기초하고, 또 높은 종교에 의거하고자 했다. 그는 신에 대해 시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감각주의가 주목하지 않는 면에 주목했다. 샤또브리앙은 루소의 자연 숭배로부터 출발해서 기독교에 대한 찬미로 옮아간다. 그는 카톨릭의 감성적인 측면, 예술적인 측면, 사회적인 측면의 의의를 역설했으며 스탈부인 보다 더 급진적인 반동주의자였다.
드 보날, 드 메스트로, 라므네는 협의의 반동철학자이다.
드 보날(1754-1840)은 인간의 언어, 사회, 법률, 통치권 등이 모두 인간 자신이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드 보날의 철학 체계>
原因
手段
結果
宇宙論
國家論
家庭
神學

政府


運動
官使

神人
物體
人民


드 메스트로(1753-1821)는 반동의 극점이다. 그는 신학상의 原罪에 대한 개념을 깊이 믿었으며 인간에 있어 악한 것은 모두 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루소의 국가론에 반대하고 몽떼스키외의 국가론에 돌아가고자 한 역사적 전통을 중시한 右翼의 이론이다. 그는 가장 좋은 政體는 군주제라고 생각했으며 오늘날 교황지상권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라므네(1782-1884)는 처음에는 로마법왕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였으나 나중에 진리를 수호하는 것은 법왕이 아니라 인류라고 했다. 그의 입장은 회의주의로 볼 수 있으며 19세기의 병은 종교에 관한 무관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성의 극단적인 요구를 제한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파스칼의 입장을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합리주의적 철학을 세웠다. 그는 신의 삼위는 인간에게는 심리적인 의지, 지성, 사랑의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결국 그의 철학은 존재 일반으로서의 절대자에게서 출발해 자연 전체에 발달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셸링의 철학과 유사하다.
- 革命精神의 哲學
쌩시몽(1760-1825)은 달랑베르의 제자이면서 오귀스트 꽁트의 스승으로 인간사회를 건설하는 수단으로 과학을 중시했다. 그는 사회적 및 종교적 재건을 꿈꾸었다. 그는 중세기가 도덕성 및 정치적 건설에 있어 대단한 진보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업을 중시했으며 노동(예술과 학문을 포함해서)이 사회적 재건의 출발점 및 중심점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한 종교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신앙 체계를 가진 종교이다.
쌩시몽주의자들 중 중요한 사람으로는 바자르(1791-1832), 앙팡땡(1796-1864),르루(1779-1871),레이노(1886-1863)가 있다. 쌩시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계승한 사회철학이며 전통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주의는 카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복원하려고 한 반면에 쌩시몽주의가 중세기를 중시하는 것은 중세기에 존재했던 사회적 요소와 외형이었다. 즉 쌩시몽주의는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社會主義를 신봉하고 다른 한편으로 파괴적 행위에서 건설적 행위로 이동하고자 한 것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로서 쌩시몽 외에 푸리에(1772-1837)가 있으며 그는 상인출신의 공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계승자로는 까베(1788-1856)와 꽁시데랑(1808-1893)이 있다.
프루동(1806-1865)은 푸리에의 공상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 일종의 개인주의와 사회중의의 중간에 섰던 사상가이며 권위를 부정하는 근대의 무정부주의의 선구자로 오늘날까지 프랑스 사회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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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31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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