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냉수리 신라비 연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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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1. 금석문의 정의
2. 영일냉수리신라비의 발견 경위와 조사
1) 금석문의 조사와 연구
2) 영일냉수리신라비의 발견 경위와 조사

Ⅱ. 본 론
1. 영일냉수리신라비의 내용 검토
2. 영일냉수리신라비가 보여주는 신라
1) 정치
2) 경제
3) 사회·문화
3. 영일냉수리신라비의 특징
1) 울진봉평신라비와의 비교
2) 그 외 신라비

Ⅲ. 결 론
1. 영일냉수리신라비가 갖는 의의
2. 영일냉수리신라비의 조사 후 느낀 점
※ 참고문헌

본문내용

신광면은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가 발견된 냉수리는 부근 흥곡리에 군내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고비는 화강암 자연석 앞·뒤·위 3면에 새긴 삼면비로서 앞면은 글씨는 새기기 위해 다듬었으나, 뒷면과 윗면은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글씨를 새겼다. 따라서 매행별 글자의 수와 간격·크기가 일정하지 않은데, 앞면에는 12행 152자, 뒷면에는 7행 59자, 윗면에는 5행 20자 등 총 231자가 새겨졌으며, 하단이 넓고 상단의 폭이 축소되는 형태로 앞면과 뒷면은 가로 65cm 내외, 세로 44~69cm 내외이며, 윗면은 가로 66cm, 세로 27~30cm 이다.
비문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거의 마모되지 않았고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자체는 대체로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서체면에서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 205호), 울진 봉평신라비(국보 242호)와 매우 유사하다.
비에는 “신라의 사부지왕(사부지왕:실성왕?)*내지왕(乃智王:내물왕)이 진이마촌(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503년?)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 부 대표가 모여 중신회의를 개최하고 전대의 두 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와 사신지 두 사람은 후에 재물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또 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촌주 두 사람이 이해의 일을 마치고 그 사실을 적는다.”라는 내용의 글을 새겼는데, 비문에 나오는 계미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 등 각종 신분명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인 5-3년으로 추정되나 학자들간의 이견(눌지왕 27년인 443년 설)이 있어 좀 더 구체적인 고증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재산권 분쟁을 각 부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중신회의에서 합의하여 처리한 내용으로 볼 때 법흥왕이나 진흥왕대처럼 왕권이 강화되기 이전 신라 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으며, 당시 화백제도의 구성 및 운영, 6부 체제로 확립되어 가던 정치제도,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풍속 제도의 실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의 성격, 형태, 글자의 새김이 신라가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생기는 토지와 재산권 분쟁에 관련된 기록을 담고 있는 울진 봉평신라비와 매우 유사하며, 일반적인 비라기 보다는 재산분배를 확인해주는 증명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비문을 거의 판독할 수 있어 신라사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이 비는 국가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언급하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 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방증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며, 신라사 연구와 한자의 전개, 금석학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어 문헌 사료로 메울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이다.
2. 영일냉수리신라비의 조사후 느낀점
이번 조별과제를 통해서 배운 점이 참 많다. 더욱이 주제에 있어서 영일냉수리신라비를 조사하게 된 데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금석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었는데, 수업을 통해서 미리 금석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번 조별과제를 하면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사실 우리 조상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있어서는 옛 문헌의 기록과 남겨진 유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후세의 사람들이 기록한 글, 후세의 사람들이 유물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을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금석문은 다르다. 유물을 통해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현실을 기록한 기록물인 것이다. 그래서 금석문의 값어치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조사하고 또 다른 학우들에게도 우리가 조사한 것을 알려주게 된 데에 있어서 크나큰 영광으로 삼고 싶다. 특히 우리가 조사한 영일냉수리신라비의 가치야말로 가히 측정할 길이 없을 것이라 사료된다. 신라시대를 알려주는 비문들 중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방면에 걸쳐서 당대의 모습을 알려주는 비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비문의 해석에 있어서 이견이 있는 부분들을 되도록 빠짐없이 기록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또 이론적 근거로서도 타당한 부분들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유홍준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글귀가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서 그리고 10월 6일에 떠나는 답사를 통해서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 참고문헌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고대로부터의 통신, 서울: 푸른역사, 2004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서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서울: 지식산업사, 2002
- 주보돈, 6세기 신라 금석문과 그 특징, 신라문화선양회, 2002년 (제 23회) 신라 금석문의 현황과 과제
- 주보돈, 6세기 금석문의 공시적 이표기와 그 의미, 문학과 언어학회, 2004년 [제26집]
- 주보돈, 迎日冷水里新羅碑(영일냉수리신라비)에 대한 基礎的(시간적) 檢討(고찰), 신라문화, 1989
- 박향미, 영일냉수리비를 통해 본 5-6세기 신라의 재산상속, 겨레문화, 1998
- 문화재청: 문화재정보센터 (http://info.cha.go.kr/)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 (http://gsm.nri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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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11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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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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