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만의 독특한 ‘카페문화’를 형성하게 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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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ntroduce」
1. 커피에 대하여
- 커피란?
- 커피의 용어
- 커피의 생산지 (Coffee Geography)

2. 유럽으로의 전파
- 원산지
- 전파 경로

3. 유럽 각국의 커피문화, 카페
- 이탈리아
- 영국
- 프랑스
- 오스트리아

본문내용

항상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웨이터들도 산뜻한 옷차림으로 손님의 취향에 맞춰 서비스했다. 카페에서는 중산계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절도를 지켰고 이탈리아인의 낭만이 충만해 있었다. 아침이면 카페에서 식사를 하는 가족들을 볼 수 있었고 저녁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카페 분위기는 활기에 넘쳤다. 상하층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카페의 고객이었으며 카페는 커피 한잔 값이면 누구나 평등해 지는 공간이었다.
- 영국
유럽 각국의 카페들은 모두 항만도시부터 생겨났는데 섬나라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1650년 터키 출신 유태인으로 알려진 쟈콥이라는 사람이 세인트 피터 교구 천사상 옆에 차린 이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패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2년 뒤에는 런던의 콘힐에 그리스인 파스카 로제가 커피하우스를 여는 등 점차 커피하우스가 확산됐지만 런던의 대화재로 인해 커피하우스가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커피하우스들이 런던 코벤트 가든을 중심으로 속속 등장했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민중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며 예술가, 지식인, 상인, 은행가들의 회합장소였으며 또 주요한 정치적 집회 장소였다.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나 1페니의 커피 한잔 값만 지불하면 커피하우스에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커피하우스들은 점차 정치클럽으로 변질되어 갔고, 명예혁명이 일어나는 등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커피하우스는 사람들에게 교류의 장으로서 무려 2,000군데가 넘게 생겨났다. 수많은 커피하우스들은 각기 그 정취가 달라 분야별로 자연스럽게 나뉘어졌다. 상인들, 성직자, 정치인, 등으로 나뉘었고 그 중 작가와 문예애호가들이 모이던 ‘윌의 커피하우스’는 영국 고유의 고전문학을 창출해 내는 산실이었다.
이렇듯 활기차고 창조적이던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영속성을 갖지 못하고 오늘날 그 전형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18세기 당시 국제정세에 따른 영국의 위상이 커피무역을 지지할 입장이 못 되었다는 데 있다. 영국은 거래할 식민커피재배지가 없었기 때문에 동인도 회사는 경제적인 이유로 중국차로 눈을 돌렸고 이로써 영국인의 홍차문화가 시작된다.
- 프랑스
프랑스에서의 커피 출현은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계층이 일상에서 해방되어 소통을 하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끌어냈다. 오늘날 프랑스인의 일상이 되어버린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카페문화는 카페가 등장한 17세기말부터 생겨난 습관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수입한 곳은 마르세이유였다. 1650년 마르세이유를 통해 수입된 커피는, 파리에서는 궁정에서부터 점차 퍼져나갔다. 1669년 루이 14세의 궁정에 터키대사가 부임하면서 많은 머피를 가져왔고 점차 궁정 사람들은 커피에 매료되었다. 루이 15세는 커피 숭배자가 되어 궁정의 식물원에서 커피를 재배하기까지 했다.
파리 최초의 카페는 1672년 아르메니아인이 개점했는데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곧 문을 닫았다. 성공적으로 처음 카페를 연 사람은 피렌체 출신의 콜텔리다. 코메디 프랑세즈 앞에 ‘카페 프로코프’이라는 카페를 열었는데, 이 카페는 파리의 문학카페로서 프랑스 정신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파리에는 수백 개의 카페가 생겨났고 궁정에서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점차 커피 붐이 일었다. 커피의 출현은 술집 연회가 사라지고 카페문화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카페는 점차 사교장이 되어갔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정신적 자극을 주고 받는 공간으로 연출했다.
대혁명 시기에는 카페에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논쟁을 벌이고 집회를 여는 등 이른바 계몽 운동을 활발히 벌였고, 인민재판의 수배자를 잡아서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 상금을 주는 본부가 되기도 했다. 혁명이 소멸된 후 카페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파리의 화가들에게는 논쟁의 장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몽마르트의 카페에 모여들어 예술적 견해를 펼쳤고 문학인들은 영감을 얻곤 했다.
- 오스트리아
빈에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연 시기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략에서 해방된 직후이다. 터키군은 물러가면서 대량의 커피빈을 빈에 남기고 갔는데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커피의 효능과 상업성을 간파한 프란츠 게오르그 콜쉬츠키는 터키인들이 남기고 간 커피를 가지고 돔갓세 6번지에 카페를 열었다. 콜쉬츠키 카페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빈 당국은 카페를 엄격한 관리와 통제 하에 놓았는데, 이는 빈의 카페가 100개를 넘지 않는 적은 수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정한다. 18세기 초반에는 30군데의 카페가 있었다. 당시의 카페에는 실내에서 흡연을 할 수 없고 큰소리로 떠들지 못하게 하는 등 몇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이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시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엄격한 제한이 있었어도 빈의 카페는 꾸준히 늘어갔다.
당시 빈의 카페는 돈을 들이지 않고 고상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였다. 빈의 시민들에게 카페는 일조의 도피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모두들 개인적인 문제나 공적인 사건들, 그리고 학문이나 예술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18세기 말 경에는 카페 영업을 철저한 허가제로 실시하고 있던 빈의 카페 수는 약 80군데였다. 시내의 카페들은 주로 작가나 예술가, 저널리스트 등 일부 교양 있는 계층을 위한 장소에서 하인이나 상인, 주방 일을 하는 여자들, 마부 등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위한 카페가 생겨났다.
당시 빈의 음악 애호가들도 카페에서 자주 만남을 가졌는데, 카페콘서트라는 것을 열기도 했다. 여름에는 다뉴브 강과 운하 사이에 있는 공원에 천막을 치고 카페영업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숲이 우거진 야외 카페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곡들이 연주되었고 ‘숲과 음악의 도시 빈’이라는 명성이 시작되었다.
1848년 혁명시대를 거치며 빈의 카페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외양은 점차 화려해졌지만 특색은 반대로 퇴색되어갔다. 수많은 근대적 카페가 생겨났지만 더 이상 예술적인 열정을 담아낼 공간이 되지 못했다.
※ 참고자료 : 김성윤, 커피이야기, 살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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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12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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