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과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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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내가 바로 세조의 여의주이다
(1) 야심 많았던 한명회, 그리고 권람과의 우정
(2) 권력을 잡다

Ⅲ. 상당 부원군 한명회의 졸기(卒記)

<참고문헌>

본문내용

(贊成)하여, 그 공(功)이 제일(第一)을 차지하였으며,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마음속에 항상 국무(國務)를 잊지 아니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건설(建設)한 것 또한 많았다. 그러므로 권세(權勢)가 매우 성하여, 추부(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賓客)이 문(門)에 가득 하였으나, 응접(應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일시(一時)의 재상들이 그 문(門)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격이 번잡(煩雜)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大)하기를 기뻐하며, 재물(財物)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寶貨)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이 일시(一時)에 떨쳤다. 여러 번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갔었는데, 늙은 환자(宦者) 정동(鄭同)에게 아부하여, 많이 가지고 간 뇌물로써 사사로이 황제에게 바쳤으나, 부사(副使)가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권세(權勢)가 이미 떠나자, 빈객(賓客)이 이르지 않으니, 초연(然)히 적막한 탄식을 하곤 하였다. 비록 여러 번 간관(諫官)이 논박(論駁)하는 바가 있었으나,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훈명(勳名)을 보전(保全)할 수 있었다. 하였다.
사신이 논평한 부분을 보면 “뜻을 얻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내다가 세조를 만나 벼슬길에 올랐고 마음속에 항상 국무(國務)를 잊지 아니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건설(建設)한 것 또한 많았다“ 라고 적고 있다. 즉 그가 세조의 책사로서 세조와 함께 이룬 것이 많았으며 야심 또한 많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뒷부분을 보면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죽을 때는 세조 때부터 성종까지 긴 시간 권력을 잡고 있었으며 세조 때는 단종을 제거하며 권력을 잡는데 함께 했고 성종 때는 수렴청정기 때 정사를 좌지우지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뛰어난 전략가로서 세조의 여의주였다.
<참고문헌>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해냄출판사, 이한우, 2006
<책사 한명회> 작은 씨앗, 이수광, 2005
<수양대군과 한명회> 민중서원, 이준범, 2004
<수양대군 다시 읽기> 학민사, 최정용, 2000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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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8.02.20
  • 저작시기2008.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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