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정조연간의 개혁정치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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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영조의 개혁정치
1) 개혁정치의 필요성
2) 개혁정치의 내용

2. 정조의 개혁정치
1) 개혁정치의 필요성
2) 개혁정치의 내용

3. 결론

본문내용

남인, 소론의 시파는 사도세자의 실덕을 말함을 꺼렸고 영조의 실덕만을 말하며 노론의 죄를 말했다. 노론의 벽파는 영조의 실덕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선세자의 실덕만을 말했으며 시파의 죄를 말했다. 남인, 소론 가운데 벽파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실덕을 함께 말하고 노론의 죄를 말했다. 이렇게 시파는 시파끼리, 벽파는 벽파끼리 결합되지 못하였으며 시, 벽은 정파가 아니었다. 정조대의 정국에서는 노론, 소론, 남인의 상호대립이 우선이었고 시, 벽의 대립은 부차적인 현상인 것이다.
한편 정조는 비대해진 노론 세력을 약화시키고 조제를 통해 당파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즉위 초 정국의 안정을 위해 노론의 편을 들었지만 왕권이 어느 정도 확립된 이후에는 어느 한 정파의 의리만을 인정하지 않고 각 정파들의 사정도 고려해 그들의 의리도 인정해 주고자 하였다. 정조는 그 일환으로 즉위 초 파직했던 윤선거 부자의 벼슬을 다시 복관시켰으며 이러한 정조의 조치는 한 정파만의 정국 주도를 배체하려는 그의 탕평관에서 비롯한 정치적 수완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결론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책은 숙종연간 첨예한 대립을 보였던 각 당파들 간의 싸움으로 정국이 어지러워지고 대 살육이 일어나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파 붕당의 입장에서 왕권을 강화하며 어지러운 정국을 안정시키고 당파에 의해 사람을 등용하기 보다는 능력이 있는 인재라면 당파를 고려하지 않고 고루 등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대립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왕권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탕평파를 등용하고 여러 당파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정치적 균형을 도모했다. 하지만 즉위한 뒤 소론을 숙청한 후에 왕위 정통성과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노론을 등용하는 등의 편당적인 면을 보인다. 이렇게 되자 정계에서 실각된 소론들과 반 영조 세력이 가담하여 무인 난이 발생하는 등 정국은 더욱 불안하게 되었으며 그의 탕평파 역시 후기로 가면서 탕평당이라 하여 외척세력에 의해 그 성격이 조금씩 변모해 가고 많은 폐해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의 탕평정책은 한계를 보인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왕이 되기 이전부터 주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왕이 된 후에는 왕권을 강화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여 영조의 탕평정책을 당파별로 자리만 안배했으며 ‘혼돈의 탕평’이라 규정하며 좀 더 새롭게 모색하고 계승 발전시켜 ‘의리의 탕평’을 내세웠다. 하지만 결국 그의 개혁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정조역시 자신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초반에 배제했던 외척을 등용한 것으로 이것은 영조역시 마찬가지로 이들 정책이 갖는 한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정조의 정책은 영조의 탕평정책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켜 극심한 당쟁이 빈번하였던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공정한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사2 숙종에서 순종까지」이성무. 동방미디어(주)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이태진.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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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01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7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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