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살아간다는 것, 그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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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수강의 변(辯)

2. 떠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떠나는 와상(臥像)의 학생(學生)

3. 선암사; 천년고찰(千年古刹)의 미(美)에 젖다.

4. 낙안읍성; ‘관광지’와 ‘마을’의 혼재(混在)

5. 티벳박물관과 대원사; 천장과 태아령,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다.

6. 돌아오다

본문내용

지만 사람의 육신을 다시 살아있는 동물에게 먹인다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마지막 보시(普施)로 해석되었다. 화장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도 매장을 하고 봉분을 쌓는 것을 더 선호하는 우리네와는 죽음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혼이 떠나간 육신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 뜯겨지고 내쳐지는 육신을 보니 지금의 내가 나의 육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살아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도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심장이 뛰고 따뜻한 피가 흐른다고 하여 진정으로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화두는 인생 내내 스스로 던지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숙연한 마음으로 대원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시는 교수님의 등에 노곤함이 업혀있는 듯 하다. 대원사는 별다른 보충 설명 없이 잠깐 산책하듯이 들여다보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여행은 어디서든 지구력이 문제다. 선하게 생긴 백구 두 마리가 우리를 맞아준다. 대원사는 초입길부터 별로 크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라는 것이 감지된다. 하지만 작은 절만의 단아한 느낌이 있었다. 박물관에도 절에도 인적은 드물었다. 교회는 늘 일요일에 예배를 하지만 절에서는 예불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진행하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큰 목탁이 보인다. 목탁에 머리를 부딪히라는 것은 깨달음과 각성을 위한 것, 아이디어가 좋았 다. 오른 쪽에는 금종각이 보인다. 금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색채의 종이 보이고 사물 중 하나인 목어가 타종의 역할을 한다. 건물의 기둥에는 주련이 붙어있다. 다른 절들의 범종각보다는 화려하고 특징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깊어보이지는 않는다.
시선을 돌리니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불상들이 보인다. 뒤쪽에는 태안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태아의 영혼을 고통과 원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어머니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어려서 죽은 갓난아기들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핏덩이들은 삼도의 강기슭 모래밭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돌탑을 쌓는데 탑이 완성될 즈음 저승의 도깨비들이 몰려와 탑을 부수어 버리고 어린 영혼들은 통곡하다 잠이 든다. 그 때 지장보살이 다가와 그 태아령들을 안고 삼도의 강을 건네준다. 이러한 불교설화에서 나온 태안지장보살의 모습은 부처의 표정 그대로였지만 그 ‘슬픈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상상을 해보자니 애련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교수님의 뒤를 쫓아 내려간다. 아까는 인지하지 못했던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을 통해 나오며 여행의 막바지를 의식하였는지 뜻 모를 한숨이 나왔다.
5. 돌아오다; 삶과 죽음에의 단상
머릿고기 만찬을 끝으로 답사는 끝이 났다. 중고등 학교 시절을 이후로 답사의 형식을 가진 여행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수학여행은 여러 군데를 다녀왔지만 기억에 남는 곳은 단언하건데 아무 데도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져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경험은 나에게 여행의 의미를 가르치고 인식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스승님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었다.
여행 내내 나의 화두는 ‘한 인간이 사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였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기에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는 종교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죽음 후의 세상은 인간에게 미지(未知)이며 두려움일 수 밖에 없다. 종교의 역사와 그 안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삶의 형태는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우리 나라의 문화유산이라는 것도 대부분이 불교라는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 부처는 실제로 존재할까? 신이라는 절대지존이 분명 존재하는 것일까? 다시금 이런 답이 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종교에 귀의하던 안하던 우리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한 순간을 살다가 어디론가 옮아가든가 다시 태어나든가 아니면 소멸하든가 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유에서 무로 가버리는 성격인가 아니면 다른 세계을 접하게 되는 통로인가 하는 것은 믿음의 유무에 달려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찌되었건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논리로 설명하자면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겐 죽음이 고통만은 아닐 것이다. 낙안읍성 한 켠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와 광주리를 만들던 할아버지의 살아가는 모습들과 불교에 귀의하여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과의 간극은 날 혼란스럽게 하였다. 신을 위하거나 내세를 위한 삶이어야 하는가? 인간을 위하거나 현세를 만끽하는 삶이어야 하는가? 죽음 후의 세상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내세를 부정하는 인간에게는 형벌이 내려지는 것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날 사로잡는다.
진실이 무엇이든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고통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이 어떠한 향기를 풍길 것인가는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늘 고민하며 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도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삶은 아름다웠다’ 라고 말하고 싶다.
* 나를 사로잡은 궁금증들.
1. 선암사의 승려들은 진정한 불자인가?
- 목사가 싸우는 것은 의아하지 않지만 해탈을 하고자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싸우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양적 가치는 서양적 가치의 대안이 아니던가?
2. 적을 막고자 성을 쌓는다면 더 높게 쌓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사다리 공격 등을 막고자 한다면 ) ‘성’ 하면 보통 중국과 서양의 높은 성들이 생각난다. 우리나라는 어떠한 한계점 때문에 낮은 성곽을 쌓았던 것일까?
3. 티벳 불교미술의 불상은 유난히 다양했던 것 같다. 어떠한 배경이 있을까?
4. 조장 사진을 더 보고 싶어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조장터 부근에 세워진 (조형미를 앞세웠던) 수미광명탑의 작은 형태를 발견하였다. 이 탑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5. 태아령이 뒤집어 쓰고 있는 빨간 모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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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10
  • 저작시기2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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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68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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