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국의 운영과 갈등 - 도학과 사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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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序言

2. 사화(士禍)
1) 무오사화(戊午士禍)
2) 갑자사화(甲子士禍)
3) 중종반정(中宗反正)과 기묘사화(己卯士禍)
4) 을사사화(乙巳士禍)

3. 도학(道學)과 성군론(聖君論)
1) 성군론(聖君論) - 도학정치의 이상적 군주상
2) 언로와 인재등용의 강조와 한계

4. 結語

본문내용

국한되지 않고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보다 차원 높은 영역에까지 도달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조(政曹) 문무관의 인사를 맡은 이부와 병부를 지칭.
를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던 훈구파와 상대적 입장에 서 있던 사림파들로서는 당연히 언관을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탄핵권을 이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함과 동시에 자기들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반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조광조는 조심스럽게나마 기존의 붕당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기를 촉구하는 붕당긍정론까지도 제시하였다. 다만 이는 지금까지 불법적이고 죄악시 되어왔던 군주제 하에서의 신료간의 집단 형성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합리화를 시도하고 붕당 형성의 계기로서 학연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지, 붕당 자체를 전면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만조, 「16세기 사림계 관료의 붕당론」, 『한국학논총』12권, p. 100, 김돈,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p. 160.에서 재인용.
사림파들은 인재 등용에 대한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기존의 인제선발 기제는 물론 과거제였는데, 그 까닭에 재능 있는 사람(才士)은 등용할 수 있되 도학을 실현할 수 있는 덕망을 갖춘 인물은 등용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훈구파로 구성된 기득권층이 과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제를 등용하는 ‘행사’(行私)의 병폐가 나타나는 등의 모순이 있었다. 이러한 모순의 극복과 자파세력의 진출을 위하여 지치를 이룰 수 있는 군자와 그렇지 않은 소인과의 구별을 강조하였으며, 『中宗實錄』 中宗 13年 4月 28日 丁酉.
새로운 인재 등용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서서 상징적이념적으로는 왕권의 절대성을 인정하되 왕권 행사의 현실적실제적 측면에서는 정당성 여부에 대해 끊임없이 제약을 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곧 군신 권력 관계가 상대화하여 조화를 이루게 됨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이 신료가 주도하는 제반 정치 운영의 전개양상은 연산군의 파행적인 정치형태에서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이후 두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언관언론의 기능이 강화되어 결국 사림 주도의 정국이 출현하게 되는 것은 상당 부분은 연산군대의 비정(秕政)으로 인한 권력관계의 파탄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이나 경연활동은 정책에 대한 자문에 응하거나 비판 기능의 행사를 가능하게 했을 뿐 정책 집행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언관 우위의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하였으나 자파 세력의 확대나 보호에 필수적인 인사권이나 병권 또한 장악하지 못하였으므로 한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림파들은 도학정치의 실현 과정상 필연적으로 생기는 개혁을 거부하며 현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훈구파와의 마찰을 특유의 과감성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지나친 과감성은 오히려 훈구대신 뿐만 아니라 사림파에게 호의적이었던 중종의 태도마저 돌려놓게 됨으로써 그들은 몰락하고 말았으며 개혁정치도 실패로 돌아갔다.(기묘사화)
4. 結語
기묘사화 이후 크게 세력이 꺾인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거의 도태되었으며, 윤원형, 이기 등 척신 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파는 계속해서 을사사화와 같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한 척신 위주의 정국 운영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세하면서 서서히 기묘을사인에 대한 인식이 호전되어 갔고, 선조가 즉위함에 이르러 사림파는 점차 중앙정계의 요직에 포진하게 되었다.
조광조에게는 의정직의 추증과 시호가 내려지게 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최연식, 이지경, 앞의 책, pp. 301-302.
기묘인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도 이루어졌으며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남곤은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더 나아가 을사인에 대한 재평가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화인에 대한 신원이 병행되었고, 선조 10년에는 결국 위사공신이 삭훈되기에 이르렀다. 사림파가 사화를 겪으면서 크게 고전하였으나 결국에는 사림파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난 것이다.
이로써 사림파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고 이후 공도와 공론을 주창하는 새로운 사림정치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이는 ‘도학정치’라는 도덕적 근본주의에 입각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의 정치활동이 그 신념을 지켜가려는 의지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재평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책, pp. 301-302.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사화를 겪고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대의 폐정을 거울삼아 꿋꿋하게 자신들의 신념을 정치세계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사림들의 정치사상은 비록 조광조 등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고 하여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또 한번의 사화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의 덕목을 바로 세우고 이상적인 요순 시대와 같은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이상은 상하위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군신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인 권력관계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역학관계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비록 사림의 집권이 그들이 비판했던 훈구의 문제를 과연 해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사림들이 확실한 ‘도’라는 정치적 이상향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신념을 갖고 추진한 점은 현대의 위정자들이 본받을 만하다고 하겠다.
<참고 문헌>
『中宗實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8권, 국사편찬위원회, 2003.
김돈,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____,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솔, 2005.
이상성,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심산, 2003.
이원균, 「李晦齋와 그 政治思想」, 『한국사상논문선집』63권, 불함문화사, 1999.
이태진 , 「조선시대의 정치적 갈등과 그 해결」, 이태진 편저 :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태학사, 2003.
최연식, 이지경, 「사림의 지치주의 정치사상」, 한국도양정치사상학회 엮음 : 『한국정치사상사』, 백산서당, 2005.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구조연구』, 일조각, 1994.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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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28
  • 저작시기20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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