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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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독후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미래경영학자 피터 드러커

2. 탈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

3. 작품 내용요약
제1부 사회
제2부 정치체제
제3부 지식

4. 지식사회의 도래와 미래의 경영자의 모습

5. 작품에 대한 비판적 접근

본문내용

비판적 접근
드러커는 맑스와 같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이전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요소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단지 18세기 이후 단계적으로 '자본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며 이를 중심으로 사회 성격이 규정되는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고, 일반화되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이라는 요소도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 지식 사회로 이행해 가고 있다.
19세기, '기업가의 시대'에는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술과 노동력을 쥐고 흔들며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고, 정부마저도 그들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미 경제의 실권은 주주들에게 이전되었고, 이제는 '지식근로자'들, 즉 해당 부문의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이전되고 있다. 더 이상 자본을 대규모로 투입한다고 성과가 커지지 않는 것이다(그것은 노동도 마찬가지다). 높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은 지식이며, 그 지식을 가진 지식근로자들이다. 이미 미국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본'은 '자본가 없는 자본', 즉 연금기금만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처럼, 피터 드러커의 지식사회론은 토플러나 나이스비트의 정보-지식사회론에 비해 더 현실적이며, 더 정연한 것으로 보인다. 토플러 등이 정보기술의 발달에만 주목, 다분히 기술결정론적인 분석과 장밋빛 일변도의 예측을 하는 것과 달리, 드러커는 '사람과 경영, 조직이 중요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보가 가공되고 정보고속도로를 통해 유통된다고 해서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지는 않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게끔 정치, 경제, 사회구조의 변화가, 그리고 개인의 윤리와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맑스가 말하는 것처럼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도래한 역사적 단계가 아니라 산업화 초기과정에서의 일시적 현상일 뿐이며, 세계사를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로 볼 수 있는 것에 못지 않게 지식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는 그의 입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모든 현상에서 자본의 움직임을 찾고, 자본가의 음모를 규명하려는 좌파 지식인들의 태도는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20세기에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21세기에는 지식 사회로 정착할 것이라는 주장, 이미 '자본가'란 사회학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지나치지 않을까 한다. 드러커는 정보화 사회론이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자본주의 세력의 마지막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좌파의 분석은 그렇다 쳐도, 엘리트주의 담론에 대해 좀 더 주의해야 했지 않을까 싶다. 정보화, 지식화의 결과 소수 엘리트가 다수 대중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고, 강대국이 약소국들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더 커진다는 분석 말이다. 회사 하나 하나를 보면 모든 회사원들이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평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직의 경계를 가로질러서 거대한 엘리트 집단, 파워 그룹이 형성될 소지는 다분하다.
국가와 정치에 대한 드러커의 분석도 다소 나이브한 데가 있다. 국가주권에 대한 논쟁에서 주권소멸론 쪽의 주장에만 편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과 정보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19세기에는 지금보다 더 자유로웠으며, 그것은 국가가 허용하고 장려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지, 국가의 통제 범위를 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길핀 등의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한, 드러커가 주장하는 것처럼 냉전국가, 유모국가의 기능이 비효율적이라 해도, 현재 막대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이들 부문이 쉽게, '합리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까?
드러커의 최대 모순은 '도구적 합리성'과 '공동체성' 사이에 모순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는 데서 연유한다. '근대화'가 논의된 이래 이 두 가지는 모순된다고 여겨져 왔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화폐물신성 때문에 공동체가 해체되고 자본의 법칙에 복무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갈 곳을 잃게 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드러커는 탈자본주의 사회, 지식사회에서는 공동체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지식사회가 그만큼 도구적 합리성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도구적 합리성을 요구한다. 이전에는 기업 안에서 사원들의 관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지식사회의 조직에서 '사원들의' 관리는 필요 없다. '직무의' 관리만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최고경영자와 전문가들만 남고 중간관리직이 일체 사라진 조직을 남긴다. 그러면 이로써 발생할 엄청난 실업 문제({노동의 종말}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드러커는 분명한 대답을 하고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으로, 토플러 등이 미래의 지식사회는 누구나 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사회가 되리라고 낙관하고 있는 반면, 드러커는 초기의 지식화에 의한 격차가 결코 극복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뒤쳐진 자들의 복지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공동체가 책임진다'라고 드러커는 말한다. 지식근로자들은 직무 이외에 지역사회에서 행하는 무보수 봉사활동에 삶의 보람을 찾을 것이며, 이를 통해 봉사받는 자와 봉사하는 자가 모두 인간적인 기쁨을 느끼는 '공동체'가 진작되리라는 것이다. 지식인과 경영인이 하나로 조화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전문지식을 열심히 연마하는 지식근로자가 동시에 일반교양과 연대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될 수 있을까? 자신만의 세계, 배타적인 동아리 속의 쾌락에 몰두할 가능성이 없는가?
드러커의 이론은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에서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이것이 가진 자, 강한 자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드러커는 자유주의에 근거한 공동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자유주의의 확산이 문명의 이름을 빌린 이질성의 배제, 소외계층에 대한 교묘한 탄압, 대량학살과 환경파괴를 배태했음을 보여주었다. 지식의 힘(power)이 정의(justice)를 가져온다는 말은 언제나 힘이 정의다(power is justice)라는 말로 환원될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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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01
  • 저작시기2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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