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연방주의의 전개과정 및 독립과정에서의 장애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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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I. 서 론

II. 아프리카 연방주의의 전개과정 및 실패원인
1. 식민통치 기간중의 아프리카연방제
가. 프랑스 식민연방의 쇠퇴
나. 영국의 이중적 식민전략 : 의회주의적 연방주의
다. 벨기에의 유산된 연방주의
2. 탈식민기 아프리카의 국가연합 시도
가. 말리연방
나. 가나-기네연맹
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연맹
라. 동부아프리카연방

III. 결론

본문내용

부존자원 보유수준의 차이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엇갈리면서 연방의 추진을 어렵게 했다. 이점에서는 동부아프리카의 우간다가 중서부의 아이보리 코스트와 가봉의 역할을 수행한 셈인데, 우간다가 그리 대단치 않은 경제력을 가지고 오만에 빠져 연방결성에 큰 장애요인으로 등장한 데는 군주제의 강한 전통으로 다른 국가들과의 정치적 융합이 그리 쉽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우간다의 수상 밀튼 오보트(Milton Obote)가 연방헌법의 최종적인 검토를 위해 소집된 회의에 갑자기 불참한 것은 부간다(Buganda)국왕
1961년 당시 우간다의 최대부족으로 전체인구의 30%를 차지하던 부간다왕국의 간다(ganda)부족은 영국식민정부의 우대하에 수출용 환금작물을 재배하여 막강한 경제력은 물론, 영국선교사들의 지도로 높은 교육수준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간다부족의 우월의식은 상권을 장악한 인도인들과 2차대전당시 버마전투 참전용사들의 복귀로 세력을 확장한 토착 부르조아계급간의 대립을 촉발하여 독립전후의 시기에 많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으나, 1962년의 선거에서 결국 카바카 예카('the king only'의 의미로 부간다국왕을 지칭)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Cf. Elikia M'Bokolo, L'Afrique au XXe si cle, op. cit., pp. 244-246.
으로서 우간다공화국의 대통령을 겸하고 있는 카바카 예카(Kabaka Yeka)와의 마찰 때문이었다. 즉, 소수부족 출신인 오보트는 수상으로서의 권력유지를 위해 부간다국왕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연방의 출범으로 카바카 예카가 전면에 나서게 될 경우, 혹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연방헌법의 선포를 저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판아프리카니즘의 선봉으로서 신속한 아프리카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지역별 연방체제의 구성을 내심으로 달가와하지 않던 엔크루마의 자가당착적인 태도도 오보트의 연방참여 의지를 쇠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단일국가 설립추진으로 노선을 변경한 오보트는 카바카 예카로 하여금 1962년 11월에 동부아프리카연방은 더이상 하나의 블록으로 추진되지 않을 것이며, 단지 가맹국간의 경제협력을 돕는 차원에서 연방이 아닌 공동체의 형태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도록 했고, 이로써 전체 아프리카대륙에서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았던 연방체제는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와해되고 말았다. 요컨대, 서부유럽에 필적하는 68만km2의 면적에 2천5백만의 인구를 하나의 국가체제안에 포용할 수도 있었던 이 연방이 출범했었더라면 이를 모델로 하는 기타 지역의 연방들이 속속 들어서 통일아프리카연방국가의 설립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프리카 연방주의자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동부아프리카는 1964년 탕가니카와 잔지바르의 합병만으로 만족한 상태에서 지역내의 공통적인 업무를 일부 교통, 재정및 과학기술 관련부서의 각료협의기구에 위임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III. 결론
아프리카 연방주의는 그 역사가 미천한 만큼 아직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일 수 밖에 없다. 유럽 제국주의열강의 식민침투가 시작되기 이전의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여러 왕국들이 서구에서 多民族간의 분규를 예방하기 위한 통치기술로 고안된 연방제의 유용성을 알리 만무했다면, 한때 연방체제의 표본으로 인식되던 동구의 연방국가들이 하나둘씩 와해되고 만 오늘날, 아프리카의 종족분규가 나날이 그 참상을 더해 가는데도 아직 진정한 연방제의 도입을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고 있음은 어쩌면 역사의 필연일지도 모른다. 국제사회에서 르완다공화국, 부룬디공화국이 종종 거론되면서도, '르완다-부룬디연방'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은 굶주린 창자를 채우기에 급급하여 '腹部의 정치'
독립이후 흑아프리카의 모든 사회현상이 지배계급의 이권확보, 즉 '주린 배를 채우는 원초적 본능'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네오맑스주의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Jean-Fran ois Bayart의 L'Etat en Afrique : la politique du ventre, Fayard, Paris, 1989, 439 p. 참조.
로 일관하는 아프리카의 국가들에게 高難度의 복합적 통치능력이 요구되는 연방주의가 '일종의 사치'
Jacques Chirac 現프랑스대통령은 1990년대초 아프리카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면서 도입되기 시작한 다당제를 일종의 사치라고 폄하하여 발언한 바 있다.
에 불과하다는 믿음 때문인가?
본고에서 살펴 본 아프리카 연방주의의 기원과 융성, 그리고 쇠퇴과정은 아프리카인들의 꿈이었던 통일아프리카의 건설이 독립과정에서 어떠한 장애요인들에 의해 좌절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식민통치국의 이해보전을 위한 노력과 신생독립국 지도자들의 개인적 야망이 상호복합적으로 연계되면서 숭고한 통일아프리카의 이념은 오늘날 그저 몇몇 국가의 헌법전문상에 장식적인 수사로만 남아있을 뿐, 그 피상적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OAU는 차라리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OAU와 각 지역별 경제협력기구를 근간으로, 남아공의 경제력을 원동추진력으로 하여 파산한 대륙 아프리카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역내의 빈곤한 국가들에게 고질병처럼 남아있는 최후의 이기적 자존심과 국제정치의 현실을 과소평가한 결과가 아닐까?
Cf. S. K. B. Asante, David Chanaiwa, "Pan-Africanism and regional integration", General History of Africa . VIII : Africa since 1935, Heinemann, California, UNESCO, 1993, pp. 724-743.
판아프리카니즘은 식민아프리카 흑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의 테제였다.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을 놓고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각종 이해관계의 포로가 되어 탄생시킨 아프리카통일기구라는 일종의 반대명제가 습관성 기능마비로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아프리카 연방주의는 정반합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역사의 당위성으로서 그 역할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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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29
  • 저작시기2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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