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와 갈리아 전쟁기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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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문인으로서의 카이사르

Ⅲ. 카이사르적 인간형이란..

Ⅳ. 갈리아 전쟁기란...

Ⅴ. 갈리아 전쟁기 요약
제 1 권 (BC . 58년)
1. 헬베티족과의 전쟁
2. 게르마니인과의 전쟁

제 2 권 (BC. 57년)
1. 벨가이인과의 전쟁
2. 해변에 살던 여러부족의 복속

제 3 권 (BC. 57 - 56년)
1. 알페스 산지에 살던 여러 부족의 토벌
2. 해변에 살던 여러부족과의 전쟁
3. 아퀴타니인과의 전쟁
4.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 4 권 (BC. 55년)
1. 게르마니인과의 전쟁
2. 브리탄니인과의 전쟁
3.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 5 권(BC. 54년)
1. 브리탄니인과의 전쟁
2.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모반

제 6 권 (BC. 53년)
1.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2. 갈리아의 사정
3. 게르마니아의 사정
4. 에부로네스족의 반란

제 7 권(BC. 52년)
1. 갈리인 전체와의 전쟁

제 8 권 (BC. 51년)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기록

Ⅵ. 결론

본문내용

렸다. 벨로바키인들은 수송대의 앞길에 불을 놓아 로마군의 시야를 가리고 도주하였다. 로마군은 곧 추격하였으나 적은 강력히 저항하여 10마일 뒤쪽에 진을 쳤다.
얼마후 카이사르는 적포로에 의해 벨로바키인이 로마군이 마초와 곡물을 수집이 예상되는 지역에 정예군을 매복시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군단을 동원하여 마초와 곡물의 수집에 나섰다.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벨로바키인은 예정대로 정예군을 매복시켰고 성급하게 기습하다가 로마군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이후 벨로바키인들은 로마군의 기병에 의해 패주하였고 로마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콤미우스만이 도망쳐 게르마니인에게로 피신하였다.
가장 호전적인 벨로바키인들을 정복한 카이사르는 각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파비우스에게 25개의 보병대를 주어 갈리아의 가장 깊숙한 지역으로 파견하였는데, 그곳의 부족이 이미 무장하고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와 12군단으로 하여금 진압을 명하고 자신은 암비오릭스의 군대를 섬멸키 위해 출정하였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 세력내의 도시와 촌락을 초토화시키고 주민을 살상했다. 그 뒤 라비에누스에게 병력을 주어 트레베리족에게로 보냈다.
파비우스의 접근소식을 들은 둠나쿠스는 겁을 먹고 그 지역에서 후퇴하였다. 파비우스는 도주하는 적을 쫓아 전리품을 취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여 1만2000의 적을 살상하고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파비우스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카르누테스족의 진지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진해서 복속을 원하였고 인질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들에 영향받던 아르모이카이족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둠나쿠스는 자기 영토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도망하다가 갈리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벨로바키족의 영지에 15개 보병대와 함께 잔류시켜 벨가이인의 음모를 저지하였으며 카니니우스의 편지를 통해 드라페스와 루테니우스에 의해 저질러진 일을 알았다. 이에 카이사르는 병력을 이끌고 카니니우스에게로 진격하였다. 올셸로두놈에 도착한 그는 진지를 구축하고 적이 물을 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적은 로마군의 진지에 불붙은 물통을 굴려 불을 내게 하고 그틈에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얼마후 샘이 말라 물을 구하지 못하게 된 적들은 위축되어 결국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들이 다시는 모반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잔혹하게 다루었다. 드라페스는 며칠간의 단식끝에 결국 사망하였다. 이 사이 라비에누스도 트레베리족의 영지에서 기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벨가인의 영지에서 겨울을 났는데 콤미우스가 로마의 기병을 기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쿠아드라투스를 기병대장으로 임명하고 콤미우스를 뒤쫓도록 하였는데 그는 도리어 콤미우스의 계략에 빠져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콤미우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지시하는데로 따르겠다고 하여 안토니우스는 이를 받아들이고 인질을 건네받았다. 카이사르가 벨가이인의 영지에서 겨울을 난것은 그들이 서로 우호관계를 맺어 반란을 음모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벨가인들의 유력자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이탈리아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 카이사르는 자신이 복점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유시와 속주를 방문하는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극진한 환영과 대접을 받았다. 이후 카이사르는 전군을 트레베리족의 영지로 불러 열병하였다.
이후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각각 일개군단씩을 파르티아전쟁에 판견하라는 안이 통과되었다. 카이사르는 정적의 속셈을 전부 알고 있었지만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원로원의 결의를 쫓아 군단을 새롭게 배치하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Ⅵ. 결론
갈리아 전쟁기의 요약만 하더라도 분량이 상당한데 굳이 소논문 속에 포함시킨 것은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쉬운 것은 갈리아 전쟁기의 일부분이나마 원문 그대로 싣지 못해 카이사르의 매력적인 문장을 맛볼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서야 생각난 사실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서문을 적어버렸다는 것을 떠올렸다. 카이사르식 저술은 역시 아무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낀다.
갈리아 전쟁기는 마치 영웅의 모험담과도 같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자기 자신의 업적에 대해 카이사르만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문마저 든다. 자신의 군사보다 3배는 많아 보이는 적군, 게다가 양쪽으로 보급로도 막히고, 포위까지 당한 상황, 그 상황에서 극적으로 적군을 전멸시키고 영웅이 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그토록 진지하고 차분할 수 있을까.. 작은 것을 이루면 속으로나마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내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진정 존경심이라 말할만한 것들이 내 가슴속을 채운다. 아마도 카이사르는 후세 사람들까지도 겨냥해서 이 글을 썼던 것은 아닐까...
*목차
Ⅰ. 서론
Ⅱ. 문인으로서의 카이사르
Ⅲ. 카이사르적 인간형이란..
Ⅳ. 갈리아 전쟁기란...
Ⅴ. 갈리아 전쟁기 요약
제 1 권 (BC . 58년)
1. 헬베티족과의 전쟁
2. 게르마니인과의 전쟁
제 2 권 (BC. 57년)
1. 벨가이인과의 전쟁
2. 해변에 살던 여러부족의 복속
제 3 권 (BC. 57 - 56년)
1. 알페스 산지에 살던 여러 부족의 토벌
2. 해변에 살던 여러부족과의 전쟁
3. 아퀴타니인과의 전쟁
4.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 4 권 (BC. 55년)
1. 게르마니인과의 전쟁
2. 브리탄니인과의 전쟁
3.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 5 권(BC. 54년)
1. 브리탄니인과의 전쟁
2.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모반
제 6 권 (BC. 53년)
1. 북방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2. 갈리아의 사정
3. 게르마니아의 사정
4. 에부로네스족의 반란
제 7 권(BC. 52년)
1. 갈리인 전체와의 전쟁
제 8 권 (BC. 51년)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기록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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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15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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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85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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