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브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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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1. 자신이 이 작가를 선택한 이유

2. 작가의 생애 또는 작가에 대한 설명

3. 작가의 그림 성향, 또는 사조
1)큐비즘(입체파)의 정의
2)초기큐비즘(입체파)
3)분석적 큐비즘(입체파)
4)종합적 큐비즘(입체파)

4. 작가가 영향을 받은 사람 또는 영향을 준 사람
1)세잔
2)피카소

5. 작가의 대표작 3점을 자세히 설명할 것
1) 신문과 파이프가 있는 정물
2) 에스타크의 집
3) 물병과 바이올린

6. 참고한 서적이나 사이트

7. 레포트를 마치며

본문내용

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5. 작가의 대표작 3점을 자세히 설명할 것
1) 신문과 파이프가 있는 정물
1912년을 전후하여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들 그림에 파피에 콜레가 도입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거의 같은 무렵 새로운 수법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 있을지 모르나 두 사람의 깊은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두 사람 중에 누가 큐비즘의 결정적인 이니시어티브를 잡고 있었는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프랑스 전통의 높은 지성을 지닌 브라크 쪽이 이론적으로 커다란 기여를 하면서, 피카소의 예술적 재질과 상조하여, 표리 일체의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 그림에서의 '파피에 콜레'는 아주 단순한 것으로 신문지가 그려진 곳에 실물 신문지를 또 기타아, 테이블 부분에 나무의 나이테 무늬 벽지를 붙이는 정도이다.
이러한 이질의 것이 그림에 도입된 것은 '분석적 큐비즘'의 화면에 균질성 해소라는 성과를 주었고, 화면에 대상의 외관과 색채가 다시 회복되어 등장하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큐비즘은 대상의 형체나 색채는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화되어 표현되었다. 즉 큐비즘의 분석적 단계에서 종합적 단계로의 일대 전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파 이프를 신문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딴 곳에 사용된 신문지는 신문 바로 그것이지만, 팡프 부분 은 그것을 부정하여 전혀 별도의 소재를 '의미'라고 있다. 이런 개념의 유희가 종합적 큐비즘 의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이다.
2) 에스타크의 집
휘어진 나무에 상자 같은 집들, 이 그림과아주 흡사한 그림으로 피카소의「저수지」가 있는데, 집의 형체가 너무도 똑같다. 이 때, 브라크는 에스파니아에 있었고, 피카소는 라 류 데 보와에 있어, 각각 따로 풍경을 그렸는데, 이렇게 조형 형식이 유사한 그림이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모두 세잔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인데,- 바로 전년 1907년에 '세잔 대 회고전'이 열렸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공동 탐구에 들어가게 된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얻은 다수의 풍경화 중에서 7점을 살롱 도통느에 출품했는데, 5점이 낙선하고 2점만 입선하게 되는데, 이후 칸 와일러 화상에서 개인전을 한 기록이 남아있다. 심사 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마티스는「에스타크의 집」을 평할 때 '작은 큐브'라는 용어를 썼고, 비평가 보오크셀이 이 용어를 빌어 "브 라크는 형을 경멸하여 모든 기하학적 도형, 즉 큐브로 환원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것이 계기 가 되어 아폴리네에르가 '큐비즘'이란 이름으로 이들 화가들을 지칭한 것이 새로운 미학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아직 자연의 대상이 남아 있지만, 대상을 대담하게 단순화하고 화면 공간 속에 실체의 구조감을 살리려는 의도에서 큐비즘의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기 시작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3) 물병과 바이올린
이 그림의 주제는 제명과 같이 물병과 바이올린이다. 브라크의 그림에 이러한 식기, 악기, 가구 등이 소재로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 까? 그것은 그들 물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형태가 기하학적이기 때문이다. 또 역설적이 긴 하지만 자연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하다 보니까 결국에 도달한 것이 그런 기하학적 형태이었기 때문에 식기나, 악기, 가구 들이 소재로 선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라크의 큐비즘이 본격적으로 되는 것은, 1909년 가을에서부터이다. 피카소와의 교우가 두터워지면서, 두 사람은 공통의 과제에 과감하게 파고든다. "젊은 세대의 화가는 관능적이 아니고 두뇌적인 작품을 우리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이다."-아폴리네에르-라는 말대로 극히 이지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6. 참고한 서적
서적 : ‘큐비즘’- 열화당 존 골딩 지음
‘큐비즘’- 열화당 데이비드 코팅턴 지음
7. 레포트를 마치며
조르주 브라크에 대해 레포트를 쓰면서 처음에 생각한대로 많은 것을 얻었던 것 같다. 흔히 피카소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고 실제 작품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입체파나 브라크에 대해서는 피카소보다 지식이 얇은 것이 사실이다.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브라크나 입체파에 대해 알 수 있어 좋았다. 미술사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는 계기가 될 듯 하다. 앞으로 남은 발표나 레포트를 통해서도 작가에 대해서 혹은 미술사조에 대해 공부하고 싶고 (아직은 어려운..^^;;) 미학에 대해서도 더 많은 지식들이 쌓아 미술 교사로서의 자질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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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17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6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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