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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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고종은 과연 유약한 인물이었나?
3. 아관파천은 과연 고종의 피신이었는가?
4. 고종은 비밀정보기관을 운용했다
5. 주권 수호를 위한 고종의 특사외교
6. 마치며
*참고자료

본문내용

호소하여 일제에게 탈취 당한 주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고종에게 비밀리에 회의참석 초청장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에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특사로 하여 헤이그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페테스부르크에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러시아 황제는 러시아 대표에게 대한제국 특사일행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하라고 하였고 외무대신과도 만나 대한 제국의 입장과 주장을 협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헤이그 시내 한 호텔에 머물면서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고종으로부터 신임장을 받은 대한제국의 대표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특사외교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헤이그 특사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은 이를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상과 같은 고종의 끊임없는 주권수호노력에 대해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한다. 광무제는 일본에 항복한 적이 결코
없다.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적도 결코 없다. 흔들림은 있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의 협조를 구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생
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
험을 무릅쓰고, 유럽열강에 호소하였으나 강제 퇴위 당하였다. 그는 고립무원의
군주였다. 조선인 모두에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영원히 기리라. Humer B. Hulbert, Korean Liberty, 1942, p.97 ; 대한제국사 연구,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편, 백산자료원, 1999
대한제국의 주권수호를 위해 고종의 특사로 활동했던 헐버트는 고종의 특사 파견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전개한 외교활동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이러한 고종의 뜻을 기리어 한국민 스스로 주권회복을 위하여 강력히 투쟁할 것을 충고한 것이다. 이 같은 고종의 계속된 주권수호노력은 일제지배하의 민족해방투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특사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방해가 큰 이유였고, 게다가 서구 열강들도 약소국인 조선보다는 일본의 편을 들어 대한제국의 위기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 조정내부에서도 일제에 협력하는 자들이 생겨나면서 고종의 특사를 미리 일본에 알려 일본으로 하여금 방해하게 하는 분파투쟁도 특사실패의 이유가 되었다. 고종은 유능하거나 한말의 정치변화의 주변인물이 아니었고 독립권 상실의 위기에 접해서는 해외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 주도적으로 일제의 침략의도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6. 마치며
이상으로 고종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역사상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 몇 가지를 짚어보았다. 고종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유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유약론‘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침략적 행위였다. 일본의 침략주의는 한국 근대사 왜곡 작업에서 국가 차원의 성과를 부정하는 데 역점을 두었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이 시대와 고종에 대한 비난과 매도를 서슴지 않았다. 고종은 위기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관파천을 행하였고 그 이후 정국 변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고종은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 될 때 비밀정보기관을 만들어 운용함으로서 일본의 침략의도를 저지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을사조약 이후에도 특사를 통한 주권 수호 운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종시대와 고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우리에게 있어 꼭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개방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100년 전에 구미열강의 개방과 맥을 같이한다. 물론 100년 전의 역사가 그대로 되풀이 될 수는 없다. 열강의 침략은 오늘날 그 방법이 달라졌을 뿐 본질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국토가 유린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열강의 경제 식민지 내지는 기술 식민지로 전락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오늘의 긴박한 상황에서 100년 전의 고종시대와 고종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글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글은 시간의 촉박함과 제한된 자료의 인용으로 내용이 충분치 못해 아쉽다. 고종시대의 역사에 접근하면서 고종실록을 모두 읽지도 못했고 그 외 여러 한문으로 쓰여진 자료들을 검토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고종과 고종시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필자의 노력부족에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
단지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에 대한 교과서의 동의할 수 없는 부분과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한 것에 만족하며 이글을 마친다.
참고자료
1. 자료 및 신문
김상수,『명성황후시해사건』, 민음사,1992.
고등학교 국사 (하), 국사 편찬 위원회, 대한 교과서 주식회사, 1996.
고종실록 36권.
대한제국사 연구,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편, 백산자료원, 1999
손진태,『국사대요』, 1982.
이태진,『고종시대재조명』, 태학사, 2000.
최문형,『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한겨례 21, 「모든 한일조약은 무효다」,1995년 8월 17일.
2. 논저
강상규, 「‘고종의 대외관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석사논문, 1995.
김기석, 「친서 발굴 경위와 의의」, 『고종황제의 주권수호 외교』, 1994.
송병기, 「고종초기의 외교」,『한민족독립운동사』1,국사편찬위원회, 1987.
연갑수, 「고종 초중기 정치변동과 규장각」, 서울학연구 창간호, 1994.
이윤상, 「1894 -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6.
주진호,「19세기 후반 개화 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연세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5.
*목차
1. 들어가며
2. 고종은 과연 유약한 인물이었나?
3. 아관파천은 과연 고종의 피신이었는가?
4. 고종은 비밀정보기관을 운용했다
5. 주권 수호를 위한 고종의 특사외교
6. 마치며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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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12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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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0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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