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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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왕조 사도세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1장 서론
1. 조선왕조 삼종의 혈맥 - 사도세자는 누구인가?
2. 북비문

제 2장 본론
1. 조선 후기의 정치적 상황
1) 노론과 소론
2) 시파와 벽파
3) 궁중 암투 (당쟁)
2. 영조와 사도세자
1) 사도세자의 생애
2) 사도세자 뒤주 피살 사건의 진실(음모)
3) 영조실록과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
3. 중용의 집 - 북비문
1) 호위무관 이석문(가문, 생애, 업적 등)과 북비문
2) 북비문과 전통적 지리관
3) 북비문의 또 다른 예

제 3장 결론
1) 요약, 정리
2) 사료를 토대로 느낀 점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연결망이기도 하다. 마을길은 물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물길을 따라 길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을길은 먼저 지형에 따라 길의 높낮이가 결정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집안의 위계이다. 위계의 중심으로부터 바깥길, 어귀길, 안길, 샛길 등으로 구분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의 마을은 최초의 이주자와 그 이주자로부터 파생되는 자손과 친지들이 마을의 안과 바깥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어떤 중심에서부터 가지가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의 모양을 띠거나 중심으로부터 방사선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을 갖추기도 한다.
방사선형의 가장 대표적인 하회마을의 경우를 살펴보면 양진당(류운룡-류성룡의 형)과 충효당(류성룡의 고택)을 사이로 방사선 모양으로 사방으로 길을 뻗어나갔다. 마을의 기반을 이룬 두 집을 시작으로 길이 마을을 관통하면서 북촌과 남촌을 자연스럽게 구분 짓게 되었다.
또한 성주 한 개 마을은 나뭇가지형으로 마을 입구에서 마을 안쪽으로 여러 갈래로 길을 뻗쳤다. 이 말은 다시 바꾸어 마을입구에서 길이 났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산 아래 한주 종택의 첫 집으로부터 마을 입구까지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겼다고 보는 게 옳다. 물론 마을 입구와 최초의 이주자가 살던 집과의 큰길은 존재했다.
마을길은 크게 마을 입구를 중심으로 마을의 영역을 알게 해주는 바깥길이 있고 어귀 길은 바깥 길에서 마을 어귀까지 이르는 길(또한 고갯길이라고도 한다)을 말하며 안길은 마을을 지나서 정자나 쉼터, 마당이나 마당의 중심인 배꼽마당까지 이르는 마을의 중요 공간으로 이동하는 길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 길 중에서도 그 위계가 낮으면서 살림집 곳곳으로 연결되는 샛길은 우물, 빨래터, 공동작업장 등을 끼고 오솔길처럼 마을의 모세혈관을 이루어 나간다. 이 샛길이 각각의 살림집을 하나씩 어어 주는 마지막 네트워크의 연결고리이다. 끝으로 마을길 중에서도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골목길이 마을길의 끝에 있다.
이렇듯 전통마을의 동선 체계는 완만한 상승감을 보이는 자연 지세에 맞춰 공간을 질서 있고 연속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즉, 마을 어귀 (바깥길 과의 만남) → 어귀길(고갯길) → 마을입구 → 안길 → 샛길 → 대문 → 안마당 → 방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때 마을길을 내는 원칙은 홍만선의 『산림경제』에서 제시하고 있다. 똑바로 오는 길은 좋지 않다고 하여 직선 길을 피하고 리을자형(ㄹ)으로 에돌아 오라고 권유한다. 마을길의 곡선화는 정지와 동작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시선의 확장과 축소를 유도한다. 따라서 정지된 마을 모습에 길이라는 동적인 구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마을길 하나에도 옛 선조들의 철학과 자연 사상을 엿볼 수 있다.
3) 북비문의 또 다른 예
북쪽으로 향하는 집은 잘 짓지 않았다. 북쪽은 추운 방향이기 때문이다.
① 아산 성준경 고택
<성준경 가옥〉은 시전 마을 중에서 동막골의 산기슭에 외딴 집으로 위치하며, 입구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바깥마당 가까이에는 대문을 대신하여 소나무가 무지개 모양으로 줄기가 휘어져 서있다. 이 가옥은 건축 양식으로 보아 19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크고 작은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채 북향을 하고 있다.
② 맹씨행단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북향집이 충남 아산의 설아산(雪蛾山) 자락에 있는 '맹씨행단'이다.
조선 초기 명재상이었던 맹사성(1360~1438) 대감의 집이다. 집은 고려 말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인구에 회자됐다. 설아산에서 내려온 지맥(地脈)에 집을 맞추다 보니 북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③ 인촌 김성수 생가
전북 고창에 있는 인촌 김성수 생가이다. 이 집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집터 앞으로는 바닷물이 보인다. 북향인 데다가 앞에 바닷물이 보인다는 점에서 독특한 터이다.
제 3장 결론
1) 요약, 정리
사도세자는 영조 38년 윤5월 13일 창덕궁 휘경전에서 장인 홍봉한이 가져온 뒤주에 갇혀 죽는데 이를 말리는 사람이 훗날 정조뿐이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즉위식 날 가슴속에 간직해온 한 마디를 선포했다. 이는 노론을 경악케 했고 사도세자가 못 이룬 개혁을 추진하다가 정조는 의문의 죽음에 처했다. 사도세자의 인품, 사고, 개혁정신 등은 시대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에 정신병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갔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70여 년을 지켜본 정치적인 인물로 남편이 죽은 지 한참 지난 70대의 나이에 쓴 한중록은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몰락한 자신의 집안에 대한 한이었을 뿐,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은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패자의 기록’은 비참하리만큼 왜곡됐거나 남아 있지 않다.
2) 사료를 토대로 느낀 점 및 제언
실제로 우리 역사의 어떤 부분에서는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팽배했으며 사실이 왜곡되어지기 일쑤였다.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밝고 어두움을 떠나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정확히 밝혀질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가치를 추출해 내는 것은 우리의 몫일뿐이다.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과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역사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참고문헌
이성무. (2000).『조선시대 당쟁사2』. 동방미디어
박영규. (2003).『조선의 왕실과 외척』. 김영사
신봉승. (2001).『조선의 정쟁5. 사도세자의 눈물 시파와 벽파』. 동방미디어
이덕일. (199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설필
박광용. (1998). 영조와 정조의 나라. 서울 : 푸른 역사
이덕일. (1998). 사도세자의 고백. 서울 : 푸른 역사
이덕일. (2004).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이덕일. (2003). 여인열전. 서울: 김영사
신정일. (2005). 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 김영사
혜경궁 홍씨. (2003). 한중록. 서울 : 서해문집
한국역사연구회. (1996).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서울 : 청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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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2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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