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으로 본 통일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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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序論)

Ⅱ. 해방 후(1945년~1948년) 정치세력에 대한 개요

1. 서설(序說)

2. 좌익세력 (조선 공산당-박헌영)

3. 중도세력(건국 준비 위원회-여운형[좌], 안재홍[우])

4. 우익세력

5. 연안 조선독립동맹(김두봉, 무정, 최창익)

6. 항일 빨치산 세력 (김일성)

Ⅲ. 태양을 꿈꾸었던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

1. 몽양(夢陽) 여운형의 삶과 그의 업적

2. 민족통일로 가는 길 : 「좌우합작운동」

3. 좌우합작운동에 나타난 토지개혁안과 통일정부수립안

Ⅲ. 결론(結論) - 통일을 위해 지향해야 할 방향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좌우합작운동의 재평가」
- 한민당은 합작 8원칙에서 통일정부수립에 대해 남북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전제 했다. 궁극적인 통일정부수립 전에 먼저 임시정부가 조속히 수립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신탁문제와 친일파 처리문제 들 당면문제의 해결을 모두 임정수립 후로 미루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처음부터 미소공위에 기대를 걸지 않았던 한민당은 미소공위 결렬 후에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점차 기울어지고 있었으므로 통일정부수립에 대한 희망은 실질적으로 갖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후에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미국의 대소 냉전정책과 시기상 부합되어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한민당이 이승만과 유착한 데서 알 수 있다. 안정애, 1996, 「좌우합작운동의 재평가」
- 좌우합작세력은 좌우합작 7원칙에서 3상회의 결정을 조선의 민주독립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미소공위 속개를 요청했으며,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다. 통일정부 수립의 과도적 기구로 입법기구 설치를 제안했고, 친일파 처리문제 등 당면 문제를 이 기구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4) 소결
- 해방 직후 정치세력들은 우파 정치세력이 미국과 연결되어 자본주의적이었고, 좌파 측은 소련과 연결되어 공산주의적이었다면, 좌우합작운동은 단순히 좌우의 합작한 합성물(合性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정한 중도 노선적 정치체제를 지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남북 통일정부를 성립시키려 한 부합물(附合物)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Ⅲ. 결론(結論) - 통일을 위해 지향해야 할 방향
이를 주도한 여운형은 해방 후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미소, 좌우에 걸친 폭넓게 활동했고, 그의 사상적 중심은 민족 내부의 통일·단결 완성에 집중되었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한반도와 완전한 통일·독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이념적 대립,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분립이라는 세 가지 대립구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고, 좌우합작운동은 바로 이러한 세 가지 대립구도를 타개하기 위한 핵심적 방안의 하나였고, 이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분단 시대’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분단의 불편한 점을 일상생활에서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일지라도 분단 슬픔이 우리의 삶을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단은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현상임은 부정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오히려 통일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리나라의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통일회의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통일은 갈라진 두 국가를 모두 다 잘 살게 만들 수 있는 점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매년 지출되는 방대한 규모의 국방비를 보더라도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될 것이다. DJ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우리나라는 햇볕정책을 사용하여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러나 요즘 북한은 핵실험이나 미사일 실험과 같은 군사적 행동을 통하여 아시아의 평화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통일은 지향해야 하며, 더욱이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통일보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두고 서서히 남북이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이 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시행해 온 햇볕정책을 유지하면서 북한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운형과 같은 통일을 위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가장 우선책이라고 생각된다. 즉, 교육을 통한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근현대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분단의 원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분단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원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는 우리 근현대사 교육이 잘 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종류의 국사 교과서에서 피상적으로 배우는 교육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와 비슷한 유형의 분단국가가 어떻게 통일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는 반면에 현실적으로 전혀 그러한 교육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조기교육을 통하여 통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두 번 다시는 분단이라는 우(憂)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에서는 북한학과 같은 학문에 대해서 좀 더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하며, 보다 좋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영국의 토니블레어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젊은 나이에 영국의 수상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통일 전문가의 조기 양성으로 통일을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교류, 과학기술적인 교류, 문화적인 교류 등과 같이 끊임없이 교류하고 대화하여 50년간 쌓여있던 벽을 허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피상적이고 단기적이며 시류에 종속한다는 단점을 피할 수 없다. 교육을 통하여 여운형과 같은 통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야 말로 통일 문제에 대해 가장 근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참 고 문 헌>
-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http://www.mongyang.org/
- 강준만,『한국현대사 산책』
- 이기형,『여운형 평전』, 실천 문학사
- 여연구,『나의 아버지 여운형』, 김영사
- 이완범,『한국 해방 3년사』, 태학사
- 이동화,「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 이정식,「‘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신동아(2007.9)
- 안정애, 1996,「좌우합작운동의 재평가」
- 노경채, 2000,「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의 전개」
- 정병준, 1995,「몽양 여운현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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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2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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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9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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